[책마을] 45분 망설이다, 종료 직전 다이빙한 소녀…獨 16년 이끈 비결은 신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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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우르줄라 바이덴펠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사람의집
376쪽|2만5000원
독일 언론인이 쓴 '메르켈 평전'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 거듭하는 리더
고뇌 끝에 결론 내면 끝까지 밀어붙여
그리스 유로존 잔류여부 2년반 고심
모두 포기할때 끈질기게 협상·설득
"내 생각 확실해질 때까지 시간 들여야"
우르줄라 바이덴펠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사람의집
376쪽|2만5000원
독일 언론인이 쓴 '메르켈 평전'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 거듭하는 리더
고뇌 끝에 결론 내면 끝까지 밀어붙여
그리스 유로존 잔류여부 2년반 고심
모두 포기할때 끈질기게 협상·설득
"내 생각 확실해질 때까지 시간 들여야"
1963년 학교 수영 시간. 아홉 살 앙겔라 메르켈이 3m 높이 다이빙 보드에 섰다. 몸이 얼어붙었다. 보드 위에서 45분을 망설이던 아이는 수업 종료 종이 울리는 순간에야 뛰어내렸다.
독일 언론인 우르줄라 바이덴펠트가 쓴 평전 <앙겔라 메르켈>에 나오는 일화다. 저자는 “메르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소개한다.
메르켈은 망설이고 뜸을 들이지만 결단의 순간이 오면 지체하지 않는다. 유럽 부채위기 때는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잔류 여부를 두고 2년 반을 질질 끌었다. 2012년 여름이 돼서야 그리스를 끌어안고 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독일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셌다. 유로존 회원국도 설득해야 했다. 2015년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모두 지쳐 포기하려고 했을 때도, 메르켈은 끈질기게 협상을 이어갔다.
메르켈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과 관련해 내 생각이 생기기까지 시간을 허용한다면 최소한 나중에 나 자신을 원망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메르켈은 지난해 말 총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에서 16년을 보낸 뒤였다. 이후 그의 생애와 리더십을 다룬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인 이 책의 미덕은 간결함이다. 동독 출신의 과묵한 소녀가 어떻게 서독 출신 남성이 주름잡고 있던 정치판에서 일인자로 우뚝 섰는지, 총리 재임 동안 어떻게 독일을 이끌었는지를 300여 쪽 분량에 모두 담았다. 그러면서도 메르켈이란 인물의 핵심을 잘 잡아낸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정치인’. 저자는 메르켈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수수한 옷차림만이 아니다. 선거 운동 때도 거창한 비전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나는 독일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같은 심심한 말을 할 뿐이다. 그는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을 유연하게 바꿨다. 한 장관은 “회의 시간에 보고가 아니라 토론이 벌어진 것은 메르켈 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지루한 정치인이다. 통상적인 규칙과 순서에 따라 조용히 일을 처리해 나갔다. 누군가는 “메르켈은 관리만 할 뿐 통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상상력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에 안정을 느끼는 유권자도 많았다. 저자는 “메르켈 같은 유형의 정치인이 네 번 연속 총리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의회가 정부 수반을 뽑는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직접 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나라였다면, 수사적 재능도 원대한 계획도 없는 정치인이 국가수반에 뽑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대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도 있다. 정치 신인 메르켈이 총리 후보로 올라선 과정이 그렇다. 양자화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일하던 메르켈은 1989년 정계에 입문했다. 1991년엔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 독일 초대 내각에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이란 점이 모양새를 좋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메르켈의 정치 이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력을 갖춘 덕분이었다. 다만 정치적 야망도 크다는 걸 주변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1999년 기회가 찾아왔다. 소속 정당인 기민련(기독교민주연합·CDU)이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렸다. 콜 전 총리는 물론 기민련 이인자였던 볼프강 쇼이블레도 불법 자금을 받았다. 메르켈은 비판의 선봉에 섰다. 정치적 아버지인 콜을 칼로 찌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2000년 당 대표가 됐다. 2005년엔 정적들을 물리치고 총리 후보에 올랐다.
메르켈은 역사에 남을 훌륭한 지도자일까? 논란이 없지는 않다. 재임 기간 독일은 ‘유럽의 병자’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성장을 이어갔다. 유럽에서 벌어진 각종 위기도 결국은 수습됐다.
하지만 독일 경제의 호황은 유로화 약세, 중국의 고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긴축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독일의 인프라, 특히 디지털 인프라는 한참 뒤처졌다. 동일본 대지진 후 성급하게 원전을 폐쇄한 독일은 탄소도 많이 배출하면서 전기료도 비싼 나라가 됐다. 러시아의 야욕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메르켈이 높이 평가받는 건 요즘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어른’이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말만 앞서는 ‘철부지’들 사이에서 메르켈은 정치인의 기본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책은 그런 메르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독일 언론인 우르줄라 바이덴펠트가 쓴 평전 <앙겔라 메르켈>에 나오는 일화다. 저자는 “메르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소개한다.
메르켈은 망설이고 뜸을 들이지만 결단의 순간이 오면 지체하지 않는다. 유럽 부채위기 때는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잔류 여부를 두고 2년 반을 질질 끌었다. 2012년 여름이 돼서야 그리스를 끌어안고 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독일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셌다. 유로존 회원국도 설득해야 했다. 2015년 사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모두 지쳐 포기하려고 했을 때도, 메르켈은 끈질기게 협상을 이어갔다.
메르켈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과 관련해 내 생각이 생기기까지 시간을 허용한다면 최소한 나중에 나 자신을 원망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메르켈은 지난해 말 총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에서 16년을 보낸 뒤였다. 이후 그의 생애와 리더십을 다룬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인 이 책의 미덕은 간결함이다. 동독 출신의 과묵한 소녀가 어떻게 서독 출신 남성이 주름잡고 있던 정치판에서 일인자로 우뚝 섰는지, 총리 재임 동안 어떻게 독일을 이끌었는지를 300여 쪽 분량에 모두 담았다. 그러면서도 메르켈이란 인물의 핵심을 잘 잡아낸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정치인’. 저자는 메르켈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수수한 옷차림만이 아니다. 선거 운동 때도 거창한 비전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나는 독일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같은 심심한 말을 할 뿐이다. 그는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을 유연하게 바꿨다. 한 장관은 “회의 시간에 보고가 아니라 토론이 벌어진 것은 메르켈 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지루한 정치인이다. 통상적인 규칙과 순서에 따라 조용히 일을 처리해 나갔다. 누군가는 “메르켈은 관리만 할 뿐 통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상상력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에 안정을 느끼는 유권자도 많았다. 저자는 “메르켈 같은 유형의 정치인이 네 번 연속 총리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의회가 정부 수반을 뽑는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직접 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나라였다면, 수사적 재능도 원대한 계획도 없는 정치인이 국가수반에 뽑히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대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도 있다. 정치 신인 메르켈이 총리 후보로 올라선 과정이 그렇다. 양자화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일하던 메르켈은 1989년 정계에 입문했다. 1991년엔 헬무트 콜 총리의 통일 독일 초대 내각에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이란 점이 모양새를 좋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메르켈의 정치 이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실력을 갖춘 덕분이었다. 다만 정치적 야망도 크다는 걸 주변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1999년 기회가 찾아왔다. 소속 정당인 기민련(기독교민주연합·CDU)이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렸다. 콜 전 총리는 물론 기민련 이인자였던 볼프강 쇼이블레도 불법 자금을 받았다. 메르켈은 비판의 선봉에 섰다. 정치적 아버지인 콜을 칼로 찌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2000년 당 대표가 됐다. 2005년엔 정적들을 물리치고 총리 후보에 올랐다.
메르켈은 역사에 남을 훌륭한 지도자일까? 논란이 없지는 않다. 재임 기간 독일은 ‘유럽의 병자’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성장을 이어갔다. 유럽에서 벌어진 각종 위기도 결국은 수습됐다.
하지만 독일 경제의 호황은 유로화 약세, 중국의 고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긴축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독일의 인프라, 특히 디지털 인프라는 한참 뒤처졌다. 동일본 대지진 후 성급하게 원전을 폐쇄한 독일은 탄소도 많이 배출하면서 전기료도 비싼 나라가 됐다. 러시아의 야욕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메르켈이 높이 평가받는 건 요즘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어른’이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말만 앞서는 ‘철부지’들 사이에서 메르켈은 정치인의 기본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책은 그런 메르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