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움직이는 듯 신비로운 파이프 기둥
언뜻 보면 단순한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파이프 모양의 원기둥들은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인 이승조(1941~1990)가 하나하나 붓으로 그린 결과물이다. 다 똑같은 파이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다. 그 덕분에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신비로운 착시 효과를 연출한다.

이승조는 27세였던 1968년부터 이런 파이프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파이프 그림’들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비롯한 주요 공모전을 휩쓸었고, 1990년 49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주목받는 작가로 활동했다. 파이프 모양의 의미에 대해선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해석이 달린다. 이승조가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누구는 ‘우주 탐사 이미지’로 읽고, 다른 누군가는 산업화의 상징이라고 풀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추상화”란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승조는 새로운 우주적·미래적 미감을 창조해낸 선각자”라고 말했다.

최근 이승조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바람이 일고 있다. 오는 30일까지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승조 개인전이 스타트를 끊었다. “수십 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신선하다는 점에서 세계에 널리 알릴 만한 작가”(윤혜정 국제갤러리 이사)라는 설명이다. 저명한 미술비평가인 존 야우 미국 럿거스대 교수는 지난달 글로벌 미술 전문 매체인 하이퍼알러직 기고문에서 “이승조의 파이프 그림들은 미국 대표 추상화가인 피터 핼리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했다.

재조명 바람에 따라 이승조 작품 거래량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2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열리는 케이옥션 ‘10월 경매’에는 이승조의 1976년작 ‘핵’(사진)이 추정가 1억3500만~2억5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박서보 이우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의 그림들도 경매에 여럿 나왔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