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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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애창곡은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었다. 29세에 요절한 그가 절규하듯 불렀다. 그 노래를 아버지가 부르는 걸 몇 번 들었다. 전상을 입어 다리를 절단한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오랜 병원 생활을 견뎌내는 중에 억척스레 노래 공부를 했다. 스승을 모셔 실력을 갖춘 아버지는 노래자랑 대회에서 몇 차례 수상했다. 그때 수상 곡은 백난아의 찔레꽃’.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 도성 남쪽 수비군이 주둔한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다. 명성황후 시해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가 장충단(奬忠壇)’을 세웠다. 글씨는 순종이 썼다.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 대한제국의 국립현충원이었다. 1910년 일제는 자신들의 흑역사를 담은 장충단을 폐사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상이군경 임의단체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돼 국가도 백성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연설했다. 1991년이었다. 왕조시대에도 나라가 은혜를 입으면 장충단을 세워 기렸다며 민주공화국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처우가 부당하다고 역설했다. 연설이 끝나자 감동한 청중 중 한 사람이 저 노래를 처연하게 부르자 모두 따라 불렀다고 한다. 몇 년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전면개정으로 아버지의 뜻은 관철돼 지금의 보상체계가 갖추어졌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 애창곡이 저 노래로 바뀌었다고 했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라는 노랫말을 쓴 작사자의 뜻은 알 수 없지만, 마치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처럼 들려 자주 부른다고 했다. 대중가요는 화자의 인생, 가수의 운명,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중의 이념이자 감성이다. 그렇게 상징해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 돼 쉽게 몰입한다.

그날 되새긴 고사성어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은혜가 사무쳐 죽어서도 잊지 않고 갚는다라는 뜻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온다. 병든 진()나라 위무자(魏武子)는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신이 죽으면 후처를 개가시켜 순사(殉死:죽은 사람을 따라 죽는 풍습)를 면하게 하라고 유언했다. 병세가 악화하자 그는 같이 묻어 달라고 유언을 번복했다. 아들은 정신이 혼미했을 때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서모를 개가시켰다. 훗날 위과가 진()나라 두회(杜回)와 전쟁 중 위태로울 때, 서모 아버지의 망혼(亡魂)이 적군의 앞길에 풀을 잡아매 말의 다리가 걸려 넘어지게 했다. 위과는 위기를 모면하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말미암을 인()’ 자와 마음 심()’ 자로 이루어진 은혜 은()마음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온으로 해석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은 어렵다. 은혜는 받은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다.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라라고 강조했다. “다른 이에게 베풀거나 도움을 줄 때 보답과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보답과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선행(善行)이 아니라 거래다란 말씀도 덧붙였다. 장충단공원을 찾아 따라 부른 뒤부터 이 노래는 내 애창곡이 됐다.

남의 배려나 은혜에 대한 보답은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어릴 때부터 가르쳐줘야 할 품성이다. 남의 배려에는 내 것을 줄이고 깎아서 내준 고결한 마음이 담겨 있다.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한 소통이다. 마땅히 화답해줘야 인간이다. 그래야 그의 선행이 빛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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