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회원국 산유국으로 이뤄진 OPEC+가 감산을 결정한 뒤 미국과 냉랭한 관계가 된 사우디아라비아가 공개석상에서 신경전을 펼쳤다.

“사우디가 더 어른스러운 입장 취하겠다”

25일(현지시간) 로이터에 따르면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 포럼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복원하겠냐는 질문에 “사우디가 더 어른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그 결과를 어떻게 되는지 보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빈 살만 장관은 “‘사우디가 미국 편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을 계속 듣고 있는데, ‘우리는 사우디와 사우디 국민 편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보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빈 살만 장관은 “비상용 비축유를 목적과 다른 용도로 고갈시키고 있다”며 “비축유의 목적은 공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서인데 시장을 왜곡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의 전략비축유 방출 결정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가 미국의 반대에도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돕는 감산 결정을 내리자 전략비축유를 풀고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백악관은 관계 재검토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면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이 사안을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만 밝혔다.

80년 동맹에서 앙숙으로

사우디와 미국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공격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암살한 배후로 꼽혔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두고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지난해 2월엔 사우디로의 미국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해 사우디를 방문하지 않았고, 관계는 더 냉랭해졌다. 올해 국제유가가 치솟자 증산 요청을 하러 7월 사우디를 내방했다. '주먹 인사'까지 나눴지만 사우디는 미국의 요청을 외면했다. OPEC+는 지난 8월 하루 10만배럴 증산에 합의하며 증산 규모를 기존보다 축소했다. 지난달에는 하루 10만배럴 감산까지 결정했다.

80년을 지탱한 동맹관계가 깨지는 셈이다. 미국은 1945년 2월 사우디 왕국과 국가 간 정식으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이후 77년간 사우디는 미국의 중동 내 최대 우방국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협력관계가 더 강화된 건 1974년 페트로-달러 협정이다. 모든 석유시장 결제에서 달러화만 사용하기로 한 결정이다. 이란과 러시아 등 산유국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란을 견제하고 싶은 사우디의 의도와 러시아를 속박하고 싶은 미국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양국 정상 간 갈등이 이를 흔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는 사석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조롱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아론 데이비드 밀러는 미국과 사우디 관계를 두고 “신뢰와 존중은 없고 모욕과 조롱만 남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사우디, 확전은 안 돼

신경전에 불이 붙었지만 미국과 사우디 양국은 확전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다. 칼리드 알팔레 사우디 투자부 장관은 포럼에서 “미국과 사우디 국민·기업 간 관계, 교육제도, 기관의 협력을 보면 양국은 매우 긴밀하다”며 “우리는 최근 다툼이 불필요하며 극복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화가 더 커지기 전에 진화하려는 발언으로 분석된다.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사우디가 감산 결정 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병합 시도를 규탄한 유엔 결의에 찬성하고 우크라이나의 재건과 인도적 지원에 400만달러를 공여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이런 조치가 감산을 상쇄하지는 못하지만 주목할 만하며 우리는 사우디가 향후 몇 주간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검토에 참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 분쟁이 격화되는 걸 방지하려는 발언이다. 하지만 양국이 속내를 숨긴 채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WSJ에 따르면 사우디는 OPEC+를 통해 러시아와 협력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서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며 편가르기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양국의 관계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가 추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때문이다. 사우디는 유가를 의도적으로 인상해 ‘네옴시티’ 등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려 한다. 유가 상승을 억제해 인플레이션을 막아보려는 미국의 입장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WSJ은 "빈 살만 왕세자는 지금이 석유를 이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석유 시대의 끝물에서 사우디 경제를 발전시키고 왕국을 현대화하는 시도를 미국 정부가 이해하지 못한 데에 실망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