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반도체의 침체는 거시경제 불확실성에 지정학적 이슈가 더해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노종원 SK하이닉스 사업담당 사장)

“지난 3년간 강도 높게 경쟁력을 강화했지만 불황과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다.”(김성현 LG디스플레이 최고재무책임자)
26일 열린 주요 기업의 3분기 실적설명회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현 상황에 대해 “고통스럽다”는 고백까지 나올 정도였다. 암울한 업황 진단은 감산으로 귀결됐다. 생산을 줄이는 극단적인 조치 없이는 생존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내년 D램 생산 증가율 ‘0%’ 될 수도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SK하이닉스는 이날 “내년 투자를 올해 대비 50% 줄일 것”이라며 “일정 기간 투자 축소와 감산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공장 내 장비 재배치 등의 작업을 통해 감산 효과를 내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노종원 사장은 “시나리오에 따라 내년 SK하이닉스의 D램 비트그로스(비트로 환산한 D램 생산 증가율)가 올해 대비 ‘0’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는 좀 더 강한 어조로 투자 축소와 감산을 얘기했다. 주력 제품인 OLED TV용 패널과 관련해서도 일부 라인 가동 중단과 일시 감산은 불가피하다는 게 회사의 판단이다. 삼성전기도 “내년 투자 규모가 올해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공급·수요 업체 모두에 ‘고통’

감산 결정은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생산해도 재고만 쌓여가는 상황이 이어지는 데 따른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 기업의 출하량에서 재고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재고율은 작년 8월 111%에서 올 8월 124%로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높은 수준으로, 팬데믹으로 항만이 막힌 2020년 5월(127.5) 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지정학적 위기 등에 따라 물건이 안 팔린 탓이다.

공급 과잉으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가격이 하락하고 있지만 스마트폰·PC·TV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선뜻 부품 주문을 못 하고 있다. 이미 창고에 부품이 많이 쌓여 있어서다. 노 사장은 “고객사 입장에서도 현재 상황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며 “재고가 쌓여 발생하는 재고평가손실 등의 이유로 여러 측면에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정보기술(IT) 완제품 판매 업체들은 이미 생산량 목표를 낮추고 가동률을 떨어뜨리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5월부터 연간 스마트폰 생산량 목표를 3억3000만 대에서 2억8000만 대로 15% 낮추고 생산 규모를 줄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도 올해 TV 생산 목표를 시장 상황에 맞춰 낮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감산, 투자 감소로 경기 악영향”

“불황은 이제 시작”이란 말도 나온다. 세계 주요 기관은 앞다퉈 세계 경제 성장률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 선진국의 내년 성장률은 0.6%로 크게 둔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내년 글로벌 교역량 증가율 전망치를 기존 3.4%에서 1%대로 낮춰 잡았다. 삼성의 한 계열사 대표는 최근 “인플레이션에 미·중 분쟁에 따른 무역 위축까지 겹쳤다”며 “예상보다 경기 하락 사이클이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실적설명회에 참가한 주요 기업 임원들의 발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 사장은 “내년 하반기께에는 시장이 안정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하지만 거시경제 상황이나 지정학적 이슈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침체기가 좀 더 길어지는 상황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감산을 통한 공급 조절 움직임은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성환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정책실 팀장은 “감산은 시차를 두고 설비투자 감소, 고용 축소로 이어지며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황정수/배성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