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막장 드라마보다 더 심해"…'유럽 콩가루 집안'의 비극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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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통의 유럽 최고 명문가 합스부르크
젊고 유능한 황제, 불세출의 미녀가 만났다
60여년 뒤 제국은 공중분해됐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그 비극적인 이야기
젊고 유능한 황제, 불세출의 미녀가 만났다
60여년 뒤 제국은 공중분해됐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그 비극적인 이야기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후반부에서는 나란히 걸린 초상화 두 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각각 주인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왼쪽·1830~1916)와 그의 아내인 시시(본명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1898)입니다.
프란츠 요제프의 초상화에는 거대한 제국을 68년이나 다스렸던 황제의 위엄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근면 성실한 태도와 엄격한 통치로 제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옆에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황후의 21세 때 모습이 걸려 있죠. 600여년간 유럽을 호령했던 최고·최강의 합스부르크 가문, 그 황실의 품격이 느껴지는 전시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개인적인 삶은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아예 방송 불가 판정을 받을 지경의 콩가루 집안이었죠. 요즘 말로 하자면 황제는 ‘일 중독자 마마보이 꼰대’였습니다. 황제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쥐잡듯 잡은 ‘악질 시어머니’였고, 황후는 ‘중증 공주병’인 데다 늘 가족에게서 도망 다녔죠. 집안 꼴이 이러다 보니 황제 부부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도 멀쩡하게 자라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황제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황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황실에서는 ‘다음 타자’를 찾습니다. 처음에는 황제의 동생인 카를 대공이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카를 대공의 아내인 조피 대공비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능력 있는 야심가이자 괄괄한 여장부였던 조피는 못생기고 바보스러운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식은 끔찍이 사랑했죠. 그녀는 “내 남편은 바보라서 못 써먹는다. 대신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똑똑하니 이 아이를 황제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황실은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제왕 교육을 받은 ‘준비된 황제’. 성실한데다 능력도 있었죠. 18세에 즉위한 청년 황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골치 아픈 일들을 척척 해결해 나갑니다. 한편 그는 어머니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했습니다. 결혼도 “정해주시는 사람이랑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조피는 고르고 골라 정략결혼 상대로 바이에른 공국의 공주 헬레네를 선택했습니다. 가문으로나 성격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상대였죠. 일종의 ‘맞선 자리’에 나간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문제는 그 상대방이 헬레네가 아니라 재미로 따라 나온 여동생, 시시였다는 점입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시시에게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했죠. 어머니는 펄쩍 뛰었지만, 아들은 “전부 양보해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버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요. 결국 드라마 같은 결혼이 성사됩니다. 프란츠 요제프가 어머니에게 반항한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치열한 고부간 전쟁이 시작됩니다. 며느리인 시시 황후는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온종일 의미 없는 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고, 남편은 얼굴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싫은 건 사사건건 잔소리하고 시비를 거는 조피 대공비입니다. 시어머니도 할 말은 있습니다. 제국의 황후가 됐으면 이 정도 의무는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리고 제멋대로인 황후를 제대로 가르쳐야 아들과 제국이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느리의 반항과 투정이라니, 자신이 합스부르크 집안에 시집왔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시시가 첫 아이를 출산한 뒤 고부갈등은 절정에 이릅니다. 조피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공주의 이름을 조피 프레데리케라고 짓고 자신의 거처에 데려가 기릅니다. 며느리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인데, 선을 많이 넘었죠. 이어 둘째 딸 기젤라도 조피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데려가 버립니다. 시시 입장에선 미쳐버릴 노릇입니다.
아이를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었던 시시는 헝가리 여행에 첫째 딸(만 2세)과 둘째 딸(10개월)을 데려갑니다. 하지만 크나큰 비극이 일어납니다. 여행 중 아이들이 병에 걸리고, 첫째 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겁니다.
삐걱대던 가족관계는 이 사건 이후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조피는 며느리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습니다. 시시는 육아를 포기하고 조피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대신 꼴도 보기 싫은 황실을 떠나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미용에 병적으로 빠져듭니다. 키가 172cm였던 시시는 평생 몸무게가 50kg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인 기준으로도 매우 적게 먹었고, 공복에 장시간 걷기 운동을 하다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넘어 비정상적인 수준이죠. 양육권을 넘겨받은 조피와 프란츠 요제프는 안타깝게도 아이를 잘 키우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아들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는 제국의 후계자였지만 웬만한 평민 아이만큼도 사랑받지 못했지요. 아버지는 지나치게 엄격했습니다. 루돌프 황태자를 아들이 아닌 후계자로만 봤죠. 황태자가 남자답게 자라야 한다며 군대식 보육교사를 붙여준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보육교사는 용감한 사람을 만든답시고 권총을 쏴서 일곱살짜리 애를 깨우고, 멧돼지에게 쫓기게 만들고, 눈밭에서 일종의 PT체조를 시켰다고 합니다. 명백한 학대입니다.
루돌프 황태자는 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시시는 아들의 약혼식조차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어른이 돼 여러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던 루돌프 황태자는 가정과 정치 모두에서 큰 실책을 저지릅니다. 이는 엄격한 프란츠 요제프의 노여움을 샀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만큼이나 나빠집니다. “너 같은 놈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는 아버지의 호통을 들은 1889년 어느 날, 루돌프 황태자는 불륜 상대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되살리는 건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럽 최고의 미녀였던 시시도, 자손의 번영을 바라며 집안을 쥐락펴락했던 조피 대공비도 행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서로 좀 더 잘 지냈다면 가족은 물론 제국의 운명까지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엔 숨은 반전이 있습니다. 잠깐 시계를 돌려볼까요. 맞선 자리에서 프란츠 요제프에게 바람맞은 시시의 언니(헬레네)가 하나 있었죠. 이 사람의 애칭은 네네였는데, 훗날 운송 사업을 하는 투른-탁시스 가문 후계자와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 비록 남편의 신분이 자신보다 낮긴 했지만 네네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피를 이은 투른-탁시스 가문 후손들은 지금도 번성하고 있습니다. 억만장자로 살면서요.
이들의 인생을 보면 진정한 행복은 성공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상한 일을 겪는다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교훈과 함께요.
창밖을 보니 단풍이 한창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이번 주말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들이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가족들과 함께 미술 전시를 보러 가는 것도 좋겠지요.
프란츠 요제프의 초상화에는 거대한 제국을 68년이나 다스렸던 황제의 위엄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근면 성실한 태도와 엄격한 통치로 제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옆에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황후의 21세 때 모습이 걸려 있죠. 600여년간 유럽을 호령했던 최고·최강의 합스부르크 가문, 그 황실의 품격이 느껴지는 전시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개인적인 삶은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아예 방송 불가 판정을 받을 지경의 콩가루 집안이었죠. 요즘 말로 하자면 황제는 ‘일 중독자 마마보이 꼰대’였습니다. 황제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쥐잡듯 잡은 ‘악질 시어머니’였고, 황후는 ‘중증 공주병’인 데다 늘 가족에게서 도망 다녔죠. 집안 꼴이 이러다 보니 황제 부부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도 멀쩡하게 자라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황제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 여자랑 결혼할래요”까진 좋았는데…
지난 코너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장 근친혼’을 다뤘죠.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들은 왕가의 혈통을 지키려고 근친혼을 일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후손들이 심각한 유전병을 앓게 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전병 때문에 지능이 낮았고 언어장애를 비롯해 수많은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황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황실에서는 ‘다음 타자’를 찾습니다. 처음에는 황제의 동생인 카를 대공이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카를 대공의 아내인 조피 대공비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능력 있는 야심가이자 괄괄한 여장부였던 조피는 못생기고 바보스러운 남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식은 끔찍이 사랑했죠. 그녀는 “내 남편은 바보라서 못 써먹는다. 대신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가 똑똑하니 이 아이를 황제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황실은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제왕 교육을 받은 ‘준비된 황제’. 성실한데다 능력도 있었죠. 18세에 즉위한 청년 황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골치 아픈 일들을 척척 해결해 나갑니다. 한편 그는 어머니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했습니다. 결혼도 “정해주시는 사람이랑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조피는 고르고 골라 정략결혼 상대로 바이에른 공국의 공주 헬레네를 선택했습니다. 가문으로나 성격으로나 흠잡을 데 없는 상대였죠. 일종의 ‘맞선 자리’에 나간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문제는 그 상대방이 헬레네가 아니라 재미로 따라 나온 여동생, 시시였다는 점입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시시에게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했죠. 어머니는 펄쩍 뛰었지만, 아들은 “전부 양보해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버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요. 결국 드라마 같은 결혼이 성사됩니다. 프란츠 요제프가 어머니에게 반항한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가족 된 사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로맨스 드라마일 텐데, 장르는 점점 스릴러로 바뀝니다. 시시는 사냥과 서커스를 좋아하고 공부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17세 소녀였습니다. 그랬던 시시가 결혼(1854년)한 뒤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잡하고 엄격한 예절을 익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같이 공식 행사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별 도움이 되진 않았습니다. 프란츠 요제프가 새벽 5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잘 때까지 일하는 워커홀릭이었거든요. 그리고 시시에게 프란츠 요제프는 ‘남의 편’이었습니다. 항상 “여보. 어머니 말씀을 따라야 해”라고 했으니까요.치열한 고부간 전쟁이 시작됩니다. 며느리인 시시 황후는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온종일 의미 없는 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고, 남편은 얼굴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싫은 건 사사건건 잔소리하고 시비를 거는 조피 대공비입니다. 시어머니도 할 말은 있습니다. 제국의 황후가 됐으면 이 정도 의무는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리고 제멋대로인 황후를 제대로 가르쳐야 아들과 제국이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느리의 반항과 투정이라니, 자신이 합스부르크 집안에 시집왔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시시가 첫 아이를 출산한 뒤 고부갈등은 절정에 이릅니다. 조피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공주의 이름을 조피 프레데리케라고 짓고 자신의 거처에 데려가 기릅니다. 며느리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인데, 선을 많이 넘었죠. 이어 둘째 딸 기젤라도 조피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데려가 버립니다. 시시 입장에선 미쳐버릴 노릇입니다.
아이를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었던 시시는 헝가리 여행에 첫째 딸(만 2세)과 둘째 딸(10개월)을 데려갑니다. 하지만 크나큰 비극이 일어납니다. 여행 중 아이들이 병에 걸리고, 첫째 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겁니다.
삐걱대던 가족관계는 이 사건 이후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조피는 며느리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습니다. 시시는 육아를 포기하고 조피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대신 꼴도 보기 싫은 황실을 떠나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미용에 병적으로 빠져듭니다. 키가 172cm였던 시시는 평생 몸무게가 50kg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인 기준으로도 매우 적게 먹었고, 공복에 장시간 걷기 운동을 하다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넘어 비정상적인 수준이죠. 양육권을 넘겨받은 조피와 프란츠 요제프는 안타깝게도 아이를 잘 키우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아들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는 제국의 후계자였지만 웬만한 평민 아이만큼도 사랑받지 못했지요. 아버지는 지나치게 엄격했습니다. 루돌프 황태자를 아들이 아닌 후계자로만 봤죠. 황태자가 남자답게 자라야 한다며 군대식 보육교사를 붙여준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보육교사는 용감한 사람을 만든답시고 권총을 쏴서 일곱살짜리 애를 깨우고, 멧돼지에게 쫓기게 만들고, 눈밭에서 일종의 PT체조를 시켰다고 합니다. 명백한 학대입니다.
루돌프 황태자는 어머니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시시는 아들의 약혼식조차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어른이 돼 여러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던 루돌프 황태자는 가정과 정치 모두에서 큰 실책을 저지릅니다. 이는 엄격한 프란츠 요제프의 노여움을 샀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만큼이나 나빠집니다. “너 같은 놈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다”는 아버지의 호통을 들은 1889년 어느 날, 루돌프 황태자는 불륜 상대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바람맞은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그 후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시시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무관심했다고 해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루돌프 황태자를 잃고 실의에 빠진 시시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습니다. 방랑벽은 더 심해졌고, 경호원도 없이 시녀 몇 명만 데리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던 중 61세였던 1898년 여행지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합니다. 왕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묻지마 살인’이었습니다. 가족들을 모두 잃은 프란츠 요제프는 더욱 맹렬하게 일에 매달립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로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지명했죠. 하지만 조카마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고 맙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방아쇠를 당겼고, 전쟁에서 진 제국은 공중분해 됩니다. (참고로 조피는 1872년 사망했습니다. 멕시코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였던 둘째 아들(황제의 동생)이 1867년 총살당한 뒤 충격을 받아 건강이 나빠졌습니다)프란츠 요제프는 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되살리는 건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럽 최고의 미녀였던 시시도, 자손의 번영을 바라며 집안을 쥐락펴락했던 조피 대공비도 행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서로 좀 더 잘 지냈다면 가족은 물론 제국의 운명까지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엔 숨은 반전이 있습니다. 잠깐 시계를 돌려볼까요. 맞선 자리에서 프란츠 요제프에게 바람맞은 시시의 언니(헬레네)가 하나 있었죠. 이 사람의 애칭은 네네였는데, 훗날 운송 사업을 하는 투른-탁시스 가문 후계자와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 비록 남편의 신분이 자신보다 낮긴 했지만 네네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피를 이은 투른-탁시스 가문 후손들은 지금도 번성하고 있습니다. 억만장자로 살면서요.
이들의 인생을 보면 진정한 행복은 성공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상한 일을 겪는다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교훈과 함께요.
창밖을 보니 단풍이 한창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이번 주말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들이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가족들과 함께 미술 전시를 보러 가는 것도 좋겠지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토요일마다 연재되는 기사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