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비극은 예고 없이 온다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은 찰나가 지옥이었다.”

50대 아버지는 담배를 빼물었다. 대학생 아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 한 명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조여왔다.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들은 새벽녘에 귀가했다. 아버지는 “가족이 모두 모였다는 게 고마웠다”고 했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 154명의 아들, 딸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피 끓는 애틋함이었을 꽃봉오리들이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어처구니 없는 후진국형 참사

믿기지 않는 비현실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세월호 침몰 트라우마가 채 가시지도 않은 터다. 이 나라는 책임을 놓고 다시 갈라질 것이다. 외국인이 26명이나 숨졌으니, ‘안전 코리아’의 이미지도 상처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다.

무엇보다 희생자 대다수가 2014년 4월 친구들을 잃은 ‘세월호 세대’와 겹친다는 게 아프다. ‘빚투’와 ‘영끌’로 삶의 무게를 통째 끌어안은 세대여서 더욱 쓰라리다. 20대의 삶은 팍팍하다.

29세 이하 청년층의 제2금융권 가계대출은 전년 말(22조6074억원)보다 17.5%나 늘었다. 우울증·불안장애로 고통받는 20대 환자도 42% 폭증했다. 다른 연령층의 두 배다. 극단적 쾌락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가장 많이 늘어난 세대가 20대라는 게 우연의 일치일까. 마약사범 가운데 20대가 30%다. 전 연령대에서 가장 큰 비중이다.

‘희망이 있을 것’이라 견디던 이들을 앗아간 게 무관심이다. 이해하기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올해 처음 열리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800명에 가까운 경찰이 코로나 확산 예방 차원에서 현장을 지켰다. 경찰은 올해 마약사범과 성폭력 단속을 위한 병력 200여 명만 투입했을 뿐이다. 번지수가 틀렸다. 한 축제 참가자는 “늘 위태로웠다. 지난해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무책임·무관심이 사고 키워

굳이 유동인구 데이터와 SNS 소통량 증가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특정 공간에 일정 규모 이상의 군중이 모일 수 있다는 건 예년의 사례에 비춰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미 방역수칙까지 해제된 마당이다. 한 명이라도 이태원 진입을 줄였어야 했는데도, 지하철 무정차 통과는 시행되지 않았다. 광화문에서 이동한 시위대와 이태원 축제 참가자의 동선이 겹치며 화를 키운 것이다.

재난은 무책임을 먹고 허를 찌른다. 주최 측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은 책임에 함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3000명 이상 모이면 구가 경찰에 관리 지원을 요청하도록 의무화한 관련 법령이 없다는 것도 허점이다. 모든 게 겹쳤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도생의 길로 빠져드는 사이, 떠밀려 가던 청년들의 삶은 좁은 골목길에서 뜻하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이 말했다.

“대비하지 못한 재난은 무책임의 구조화를 낳고, 국가 불신을 만든다.” 시민의 불신은 국가의 비극이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