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탈중앙화?…진짜 '탈중앙화'된 암호화폐에 투자하라 [한경 코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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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훈종의 알쓸₿잡 <52>
10월 31일 한국경제신문의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코알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주 3회 아침 발행하는 코알라를 받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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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답변에 진행자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크게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현대 자유인의 모습이란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사실 현실에서 크든 작든 어딘가에 어느정도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매일같이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에 간신히 매달려 출근하는 직장인이 스스로를 ‘월급의 노예’라 부르고, 일거리를 따내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해야 하는 프리랜서와 자영업자가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노예’라 부르는 이유다.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현대인이 탈출지로 택하는 곳은 흔히 집단이다. 공부에 지친 10대가 아이돌 가수에 빠져 팬클럽 활동을 하고, 직장 생활에 지친 30대가 특정 스포츠 팀에 빠져 서포터즈에 들어가는 현상이 이에 해당한다.
자주적인 개인에서 탈피하여 자꾸 집단으로 종속되려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한 학자가 있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고전 명저를 쓴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1941년 나치즘이 전 유럽에서 한창 절정이던 시절 이 책을 펴냈다. 독일인은 원래 슈베르트, 모짜르트, 슈만을 배출할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헤겔과 칸트로 대변되는 독일 철학의 진원지 답게 이성적이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국민이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게 된 걸까? 에리히 프롬은 그 이유를 인간 본성 한 켠에는 개인으로 홀로 서기보다 조직에 들어가 남들과 함께해야 안도하는 노예의 근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비로소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굴종하는 본성 때문에 자유로부터 다시 도피하게 되었고 그 탈출지가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수백년을 이어온 봉건주의와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으로부터 개인의 에너지가 해방되자 나타난 가장 큰 결과는 바과학의 경이로운 성장이었다. 무엇이 옳고 합당한 것인지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정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이 새로운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의 실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 비로소 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인류 삶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지만, 더욱 중요한 파급효과는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성공을 통해 자기 운명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지위를 개선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물론 사람들이 때때로 ‘평등한 사회’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복지’와 같은 사회주의적 구호에 쉽게 열광하곤 한다는 사실은 하이에크도 잘 알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이 주창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습성이다. 그러나 이런 유토피아적 사상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하이에크의 주장이었다. 하이에크는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확대할 경우 나치처럼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독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주체는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업들에 데이터를 제공해주고 있다. 페이스북은 사용자 프로필과 그들의 친구 상태 업데이트를 수집한다. 페이팔은 사람들의 계좌 잔액을 수집하고, 아마존은 SKU (Stock Keeping Unit)라 불리는 물건 재고, 결제 내역, 구매 내역을 수집한다. 그리고 구글은 웹페이지와 쿼리 히스토리를 수집한다. 물론 이 회사들의 성공엔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했을 테지만 그 핵심에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누가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보까지 접근 가능한지는 오로지 해당 회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만약 웹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서 플랫폼 기업들의 허가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도록 놔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온갖 종류의 구속과 정보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팀 버너스 리가 고안한 월드와이드웹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웹 2.0은 개인 사용자들을 몇몇 기업이 만든 울타리 안에 잡아 가두는 형태가 되었다.
정말 인간이 본래 주어진 환경에 굴종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 충분히 쓰기 편한 인터넷을 굳이 복잡하고 어렵게 개선할 필요가 없다면, 비트코인과 같은 무허가 프로토콜은 왜 등장한 것일까. 비트코인은 네트워크 접속을 확인할 수 있는 ‘접근 가능 노드’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1만6000여 개가 있다. 암호화를 통해 접속 여부를 가리고 있는 노드들까지 합치면 4만여 개의 노드가 실시간으로 비트코인 데이터를 내려받아 동기화하고 있다. 이들은 노드 활동을 통해 아무런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도 왜 굳이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일까.
자유를 갈망하는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과학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경험한 21세기 인간에게 자유는 더 이상 조건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이미 주어진 자유를 빼앗으려는 그 어떤 종류의 시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등장과 그 후로 발전한 암호화폐,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은 바로 자유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터넷이 거대 플랫폼들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통제받는 공간으로 변질되자, 마치 풍선의 한쪽을 밟으면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듯 인터넷을 탈중앙화 시키려는 움직임이 발현된 것이다.
모든 암호화폐의 최종 목적지는 탈중앙화여야 한다. 블록체인 기술과 토큰 경제를 접목하여 모양만 그럴싸하게 표방한 암호화폐는 웹 3.0의 가면을 쓴 또다른 플랫폼 기업일 뿐이다. 암호화폐에 투자할 때는 그것이 기존의 중앙 집권적이고 획일화되고 집단 주도적인 시스템을, 탈중앙화하고 분산화하고 개인화 가능성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풍선을 더욱 세게 밟으려는 움직임이 강해질수록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 역시 덩달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풍선이 더 이상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지는 때가 오면 비로소 웹 3.0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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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얼마전 도서 ‘웹 3.0 사용설명서’의 저자로서 한 유명 유튜브 채널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한창 방송을 하던 중에 진행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근데 정말 사람들이 웹 3.0을 원하기는 할까요? 살면서 가뜩이나 신경쓸 일도 많은데 인터넷은 그냥 편하게 하면 안되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터넷을 편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로 개인정보와 행동 데이터를 빅테크에 넘기면 결국 그들에게 종속됩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삶은 현대 자유인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나의 답변에 진행자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크게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현대 자유인의 모습이란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사실 현실에서 크든 작든 어딘가에 어느정도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매일같이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에 간신히 매달려 출근하는 직장인이 스스로를 ‘월급의 노예’라 부르고, 일거리를 따내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해야 하는 프리랜서와 자영업자가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노예’라 부르는 이유다.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현대인이 탈출지로 택하는 곳은 흔히 집단이다. 공부에 지친 10대가 아이돌 가수에 빠져 팬클럽 활동을 하고, 직장 생활에 지친 30대가 특정 스포츠 팀에 빠져 서포터즈에 들어가는 현상이 이에 해당한다.
자주적인 개인에서 탈피하여 자꾸 집단으로 종속되려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한 학자가 있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고전 명저를 쓴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1941년 나치즘이 전 유럽에서 한창 절정이던 시절 이 책을 펴냈다. 독일인은 원래 슈베르트, 모짜르트, 슈만을 배출할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헤겔과 칸트로 대변되는 독일 철학의 진원지 답게 이성적이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국민이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게 된 걸까? 에리히 프롬은 그 이유를 인간 본성 한 켠에는 개인으로 홀로 서기보다 조직에 들어가 남들과 함께해야 안도하는 노예의 근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비로소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굴종하는 본성 때문에 자유로부터 다시 도피하게 되었고 그 탈출지가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이다.
노예의 길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이 정말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면 냉전 이후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며 세계 경제가 커다란 성장을 이뤄낸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대 문명이 개인주의에 기초해 진화했으며, 인간은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만큼 더욱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다. 그는 저서 ‘노예의 길’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유럽 현대사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의 발전은 각 개인들이 관습이나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중략) 정치적 자유가 주어지자 의도치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부산물인 경제 활동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져왔고, 그 결과 경제적 자유를 지지하는 일관된 주장이 보다 정교해졌다.”
유럽에서 수백년을 이어온 봉건주의와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으로부터 개인의 에너지가 해방되자 나타난 가장 큰 결과는 바과학의 경이로운 성장이었다. 무엇이 옳고 합당한 것인지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정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이 새로운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의 실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 비로소 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19세기 이후 인류 삶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지만, 더욱 중요한 파급효과는 아마도 사람들이 이런 성공을 통해 자기 운명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지위를 개선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시장 경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물론 사람들이 때때로 ‘평등한 사회’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복지’와 같은 사회주의적 구호에 쉽게 열광하곤 한다는 사실은 하이에크도 잘 알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이 주창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습성이다. 그러나 이런 유토피아적 사상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하이에크의 주장이었다. 하이에크는 국가가 사회주의 정책을 확대할 경우 나치처럼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독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자유로부터 도피한 인터넷
다시 원래 주제인 인터넷으로 돌아와 보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은 몇몇 플랫폼들로 권력이 집중된 형태를 띄고 있다. 현재 인터넷 플랫폼 기업들이 커다란 권력을 갖게된 이유는 그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컨트롤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은 누가 그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쓸 수 있는지, 그리고 누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다. 페이스북만이 이 데이터베이스를 수정할 수 있고 이것이 페이스북이 가진 권력의 근원인 것이다.이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주체는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업들에 데이터를 제공해주고 있다. 페이스북은 사용자 프로필과 그들의 친구 상태 업데이트를 수집한다. 페이팔은 사람들의 계좌 잔액을 수집하고, 아마존은 SKU (Stock Keeping Unit)라 불리는 물건 재고, 결제 내역, 구매 내역을 수집한다. 그리고 구글은 웹페이지와 쿼리 히스토리를 수집한다. 물론 이 회사들의 성공엔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했을 테지만 그 핵심에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누가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쓸 수 있는지, 어느 정보까지 접근 가능한지는 오로지 해당 회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만약 웹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서 플랫폼 기업들의 허가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들이 인터넷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도록 놔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온갖 종류의 구속과 정보의 왜곡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팀 버너스 리가 고안한 월드와이드웹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웹 2.0은 개인 사용자들을 몇몇 기업이 만든 울타리 안에 잡아 가두는 형태가 되었다.
암호화폐, 자유의 카운터 펀치
여기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2009년 비트코인 백서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어떻게 플랫폼 기업들의 허가가 필요없는 인터넷을 실현시킬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분산된 데이터베이스나 연합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려는 시도는 있었다. 대표적인 것들이 ACH 나 VISA 같은 금융 네트워크들인데, 이들도 여전히 소규모 단체가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껏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것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합의 프로토콜이다. 데이터에 대한 접근, 사용 여부, 삭제에 대한 결정권한 등에 대해 사용자들끼리 의논하고 합의할 수 있는 프로토콜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무허가’ 프로토콜이다.정말 인간이 본래 주어진 환경에 굴종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 충분히 쓰기 편한 인터넷을 굳이 복잡하고 어렵게 개선할 필요가 없다면, 비트코인과 같은 무허가 프로토콜은 왜 등장한 것일까. 비트코인은 네트워크 접속을 확인할 수 있는 ‘접근 가능 노드’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1만6000여 개가 있다. 암호화를 통해 접속 여부를 가리고 있는 노드들까지 합치면 4만여 개의 노드가 실시간으로 비트코인 데이터를 내려받아 동기화하고 있다. 이들은 노드 활동을 통해 아무런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도 왜 굳이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일까.
자유를 갈망하는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과학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경험한 21세기 인간에게 자유는 더 이상 조건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이미 주어진 자유를 빼앗으려는 그 어떤 종류의 시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비트코인의 등장과 그 후로 발전한 암호화폐,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은 바로 자유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터넷이 거대 플랫폼들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통제받는 공간으로 변질되자, 마치 풍선의 한쪽을 밟으면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듯 인터넷을 탈중앙화 시키려는 움직임이 발현된 것이다.
모든 암호화폐의 최종 목적지는 탈중앙화여야 한다. 블록체인 기술과 토큰 경제를 접목하여 모양만 그럴싸하게 표방한 암호화폐는 웹 3.0의 가면을 쓴 또다른 플랫폼 기업일 뿐이다. 암호화폐에 투자할 때는 그것이 기존의 중앙 집권적이고 획일화되고 집단 주도적인 시스템을, 탈중앙화하고 분산화하고 개인화 가능성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풍선을 더욱 세게 밟으려는 움직임이 강해질수록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 역시 덩달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풍선이 더 이상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지는 때가 오면 비로소 웹 3.0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백훈종 샌드뱅크 COO는…▶이 글은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구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소개한 외부 필진 칼럼이며 한국경제신문의 입장이 아닙니다.
안전한 크립토 투자 앱 샌드뱅크(Sandbank)의 공동 창업자 겸 COO이자 "웹3.0 사용설명서"의 저자이다. 가상자산의 주류 금융시장 편입을 믿고 다양한 가상자산 투자상품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샌드뱅크를 만들었다. 국내에 올바르고 성숙한 가상자산 투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각종 매스컴에 출연하여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