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

힐리언스 전체는 통신망이 잡히지 않는 디지털 디톡스 공간으로 운영된다. 입촌도 하기 전부터 내비게이션에서 변화가 감지된 걸 보면 효과는 확실했다. 주차장에서 웰컴센터가 있는 가을동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한 시간, 스마트폰 신호가 잡히지 않자 슬슬 불안해졌다. ‘타의적 불편함’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숙소까지 오르는 내내 가파른 언덕이 이어졌다. 엘리베이터가 따로 없어 두 다리만이 유일한 이동 수단이다. 이 박사가 헬리콥터를 타고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부지라는 직원의 설명이 이해됐다. 객실 문을 열자 익숙한 TV 대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종자산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 끝에 서서 스마트폰을 높이 치켜드니 신호가 약하게 한 칸 잡혔다. 도통 말을 듣지 않는 메신저를 들락날락하며 바깥세상과 소통하려 애쓰다 포기했다. 유일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비워크 힐리언스’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의도된 불편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먹고, 움직이고, 비우고, 흘러가라

기본 패키지는 ‘쉼스테이’다. 평일 기준 30만원 내외의 가격에 숙박은 물론 조식과 석식, 트레킹·명상 등 데일리 프로그램, 각종 부대시설을 누릴 수 있다. 객실 제공만으로는 힐리언스가 추구하는 가치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이 박사의 신념 덕이다. 이곳 식습관의 기본은 소식다동(小食多動),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라는 뜻이 담겼다. ↗

↘싱싱한 채소와 품질 좋은 산나물, 달걀, 닭고기 등 식이섬유와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 준비된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저염식이지만 심심하지 않다. 테이블 위의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30분에 맞춰 천천히 식사했다. 한 숟갈에 서른 번 이상 꼭꼭 씹어 식판을 뚝딱 비웠다.

배를 채웠으니 움직일 차례다. 명상·요가 등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 가운데 숲 테라피를 택했다. 빗줄기가 굵어진 탓에 짧게 산책한 뒤 ‘숲속 유르트’라는 공간에 매트를 깔았다. 강사의 안내에 따라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이완했다. 땅에 등을 대고 누우니 빗방울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들숨마다 피톤치드가 폐 가득 채워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하다 까무룩 잠들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혼란스러웠다. 스마트폰 대신 지도를 들고 마을을 천천히 살펴봤다. 홀린 듯 숲속 동굴 와인바 ‘선향 동굴’로 향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곁눈질하며 ‘혼술’하는 습관도 여기선 버려야 한다. 대신 통창 너머의 숲과 별을 바라보며 가볍게 와인 한 잔을 즐겼다. 애써 무엇을 채우려 하지 않으니 절로 마음이 비워지고 시간은 유유자적 흘렀다.

불편함, 습관이 되다

알람이 미처 울리기 전 눈이 번쩍 뜨였다. 오랜만에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비가 그친 트레킹 길에서는 산책 나온 반려견 가족을 만났다. 가공되지 않은 대자연 곳곳에서 토끼, 고양이 같은 동물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 명상 프로그램을 듣고 유료로 운영되는 목공방 체험을 신청했다. 목공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하나뿐인 트레이 만들기에 나섰다. 쉴 새 없이 톱질·사포질을 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평소 같으면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자랑하느라 정신없었을 순간이 온전한 성취감으로 바뀌어 다가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1세기 인류를 가리켜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 규정했다. 휴대폰을 뜻하는 ‘포노(phono)’와 생각·지성을 뜻하는 ‘사피엔스(sapiens)’의 합성어로, ‘스마트폰을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 않는 신인류’를 말한다. 끊임없이 성장을 거듭해온 포노 사피엔스도 가끔은 진화를 멈추고 자발적으로 쉬어갈 수 있어야 한다. 숲속에서의 시간은 귀했다.

박소윤 여행팀 기자 sos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