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자유의 위기 부르는 '개딸논리'
선택할 자유에 대한 정부의 통제 범위가 확대됐다. 금융위기, 코로나19 감염병 등으로 자유는 더 좁혀졌다. 번영의 원동력인 자유가 위기에 처해 있다. 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자유 사회의 전제는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 홀로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 토크빌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모든 근심거리와 생활상의 어려움”을 기꺼이 맞이하는 자치 의지가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수반되는 자유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 집권층을 지지하는 30% 내외 정도다. 이에 반해서 좌익 정당의 지지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치로 지지층은 비교적 견고한 편이다. 친(親)북·중·러와 주사파의 세력도 만만하지 않다. 사회주의 정책이 효율적이고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할 자유와 책임을 두려워하는 지지자들 때문에 좌파 정당들이 안정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와 책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국가가 대신해서 선택하고 책임져주길 바란다.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부모와 어린 자녀 간의 관계와 똑같이 본다. 이런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자 대부분이 간과한 어버이주의(parentalism)라고 부르는 이유다. 부모는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붙들어주고 상처가 나면 치료해주고 행동이 지나쳐도 책임을 묻지 않고 흔쾌히 용서한다. 어린아이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하다고 해도 두려움 없이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자녀와 부모 관계를 시민과 국가의 관계로 바꿔 사용하는 ‘개딸(개혁의 딸)’과 ‘양아들(양심의 아들)’의 논리야말로 특정한 지도자가 부모처럼 지지자들을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롭게 홀로 있으면 일자리, 소득, 건강과 노후가 불안하다고 느낀다. 자녀 보육·교육에 대한 책임 때문에도 불안하다. 낯설고 믿을 수 없는 ‘그들’만이 있을 뿐, 나를 책임져줄 ‘우리’가 없다. 어버이 품에서 떨어진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은 공포에 떤다. 자유·책임·독립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다.

불안하면 의지할 것을 찾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들은 한동안 신(神)에 의지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 이후 사람들은 의지할 유일한 건 국가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인기 있는 구호인 이유다.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나의 선택의 자유는 희생돼도 좋다. 국가권력에 복종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예속이 자유보다 좋다. 자유의 포기와 예속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이다. 정부가 원하는 가치를 시민들에게 강제로 부과해 개인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게 아니다.

오늘날 자유의 위기를 초래한 건 ‘어버이 사회주의’의 ‘개딸 논리’ 때문이라는 걸 입증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한국의 좌파 정부들, 특히 문재인 정권의 탄생, 복지 확대, 기본소득제는 많은 사람이 통제받고자 하는 갈증을 증명한다. ‘행복한 감시국가 중국’, 러시아 푸틴과 중국 시진핑의 장기 집권도 국가에 의존하고 싶은 시민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에의 예속을 그리워하는 ‘병든 사람들’은 선동가와 포퓰리즘이라는 ‘병든 국가’의 노리갯감이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반(反)인간적 군중심리 때문에 그런 체제는 민주주의를 지속하게 하는 기능을 위태롭게 해 전체주의를 부르는 게 필연이다.

‘병든 체제’를 막아낼 지적 무기를 개발하는 게 자유주의자의 시급한 과제다. 어버이 사회주의는 노예의 길이라는 것 등은 어버이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국가 대신에 누구에게 부모의 역할을 맡기는가의 문제다. 그게 공공정신이 투철한 일부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설립된 민간재단, 기금, 자선단체, 복지기관 등 소규모의 공동체다.

자유주의적 이상은 시장경제에 참여해 번영할 기회를 가진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개인의 사회일 뿐 아니라 개인이 ‘나눔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다. 그런 제3의 독립부문(하이에크)은 정부보다 훨씬 더 효율을 낼 수 있다. 이게 개딸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