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실질심사 제도 도입하고 특허법원·행정법원 신설
1993∼99년 대법원장 지내며 '사법제도 지각변동' 이끌어
'사법개혁 초석' 윤관 전 대법원장 별세…향년 87세
'20세기 마지막 대법원장' 윤관 전 대법원장이 14일 노환으로 영면에 들었다.

향년 87세.
1935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윤 전 원장은 광주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58년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2년 법조계에 입문했다.

서울민사지법·형사지법·광주고법·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청주·전주지법원장 등을 거쳐 1988년 대법관이 됐고, 제9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1989∼1993년)과 제12대 대법원장(1993∼1999년)을 지냈다.

37년을 판사로 살았다.

법조계에서는 윤 전 원장의 대법원장 재임기간 6년을 '사법제도의 지각변동' 시기로 평가한다.

윤 전 원장의 사법개혁은 취임 첫해에 구성된 '사법제도발전위원회'가 주도했다.

위원회에는 법조계, 학계, 정치권, 언론계, 시민단체 인사 등 32명이 참여했는데, 윤 전 원장은 인권변호사들도 위원으로 들어오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택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개혁 성과로 꼽히는 것은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 제도 도입(1997년 시행)이다.

이 제도가 있기 전까지 판사는 수사기록만 보고 구속영장을 발부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피의자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수사 과정에 문제는 없었는지를 따지기보다 우선 구속부터 한 뒤 추가 수사를 하는 수사기관 편의 중심의 관행도 한몫 했다.

검찰은 피의자 신병 확보가 어려워진다며 영장실질심사 도입에 공개적으로 반발했지만 윤 전 원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영장실질심사는 뿌리를 내렸고 구속영장이 청구된 모든 피의자가 판사의 대면 심문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996년 15만4천435건에 달하던 구속영장 청구 건수는 영장실질심사 도입 후 꾸준히 줄어 지난해에는 2만1천988건이 됐다.

영장 발부율도 같은 기간 92.6%에서 82.0%로 떨어졌다.

서울민사·형사지법을 통합한 서울중앙지법 출범(1995년)이나 특허법원·행정법원 신설(1998년) 등 법원의 외형뿐만 아니라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실 설치, 사법보좌관 제도 시행, 법관평가제도 도입 같은 제도 영역에도 윤 전 원장의 손길이 닿았다.

이밖에도 기소 전 보석 제도 도입, 간이 상설법원 설치, 상고심사제와 증인신문 방식 개선 등도 업적으로 꼽힌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이어진 구습을 타파해 사법부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도 고인은 심혈을 기울였다.

일선 판사실은 물론 대법원장실에까지 걸려 있던 대통령 사진을 떼어냈고, 청와대에 법관을 파견하거나 정보기관 직원이 법원에 출입하는 일을 막았다.

대통령이 외국을 오갈 때면 대법원장이 공항에 나가 맞이하던 관례도 없앴다.

임기 막바지까지 제도 개선 노력을 계속했지만 1998∼1999년 의정부·대전에서 법조 비리 사건으로 판사 불명예 퇴진이 잇따르는 등 시련도 겪어야 했다.

퇴임 후에는 2000년 영산대 석좌교수·명예총장에 취임했고 2004년부터 영산법률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상훈으로는 청조근정훈장(1999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2015)이 있다.

자랑스러운 연세인상(1994년)과 자랑스러운 해남윤씨상(2000년)도 받았다.

저서로 '신형법론'을 남겼다.

유족으론 부인 오현 씨와 아들 윤준(광주고법원장), 윤영신(조선일보 논설위원)씨, 남동생 윤전(변호사)씨 등이 있다.

대법원은 법원장(葬)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예정이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