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거울'로 새롭게 조명한 '리골레토'[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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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오페라단 제작·장서문 연출
동시대 감성 살린 무대 연출 인상적
양준모·이혜정·이명현 열연 돋보여
동시대 감성 살린 무대 연출 인상적
양준모·이혜정·이명현 열연 돋보여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2막 2장. 만토바 공작 패거리가 간밤에 리골레토의 숨겨온 ‘애인’을 납치한 전모를 공작에게 무용담처럼 들려주는 합창 장면입니다. 무대 뒤편에 패거리로 분한 20여 명의 합창단원이 괴기한 가면을 쓰고 도열합니다. 이들은 마치 뮤지컬 무대의 코러스 군무처럼 연약한 짐승을 사냥하는 개 떼 같은 동작을 취하며 앞으로 전진합니다.
몇몇은 무대 중앙에 세로로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 탁자에 올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군무와 합창을 리드합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나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는데” 하며 순수한 그녀(질다)를 납치해 눈물 흘리게 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던 만토바 공작은 패거리들을 마주 보고는 신이 나서 군무를 지휘하는 코치처럼 같은 춤을 춥니다.
지난 1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 서울시오페라단의 ‘리골레토’ 마지막 공연 현장입니다. 관객이 1막 후반부에서 봤던 내용을 노래로 되풀이하기에 정적으로 연출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섬뜩하게 펼쳐냅니다. 이번 무대를 연출한 장서문은 연출 노트에 “인간이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마치 벌레같이 혐오스럽고 본능에 충실한 동물적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썼는데 그럴듯합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코러스 개개인의 표정들에서 약자를 무리 지어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집단 광기마저 느껴졌습니다.
이전 ‘리골레토’ 무대에서 볼 수 없던 코러스 연출과 연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주로 대극장 무대에 올려진 ‘리골레토’를 중극장에서 본 것도 처음입니다. 서울시오페라단은 베르디 오페라 중 가장 극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리골레토’를 600석 규모의 M씨어터에 맞게 제작했습니다. 이 공연장에서 2020년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를 올린 장서문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정주현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더 피니가 공연장 규모와 좁은 피트 석에 맞춰 20여 명의 소편성으로 연주했습니다. 나흘간 열린 공연 중 마지막 날에는 B팀인 양준모(리골레토), 이혜정(질다), 이명현(만토바 공작), 박준혁(스파라푸칠레), 전태현(몬테로네), 임은경(막달레나) 등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대 오페라 공연의 트렌드는 대본과 음악은 거의 그대로 두면서 시·공간적 배경은 원작과 아예 달리하는 것입니다. 원작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살리는 무대가 요즘은 더 드문 것 같습니다. 이번 공연도 이런 흐름을 따라갑니다. 현대적이고 상징적인 무대 연출과 동시대의 감성으로 ‘리골레토’를 재조명하고, 재해석했습니다. 1막 배경부터 19세기 이탈리아 만토바 궁정이 아니라 요즘의 상류층 비밀 사교 클럽 같습니다. 복장도 요즘의 것입니다. 무대 양쪽에 클럽 분위기와 썩 어울리는 벽면 거울 세트가 비스듬히 위치합니다. 이 거울 세트는 1막뿐 아니라 2막과 3막에도 각도를 달리하며 등장인물들을 비춥니다. 객석 중앙에 자리 잡은 관객이라면 리골레토와 질다, 만토바 공작이 아리아를 부를 때 무대의 실제 모습과 양면 거울에 비친 모습 등 세 가지 각도에서 등장인물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비친 모습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인물의 내면에 좀 더 다가가게 합니다. 질다의 방을 새장처럼 표현한 연출도 효과적입니다. 리골레토의 과도한 보호막에 갑갑해하는 질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역동적인 연극적 기법과 연출이 극적 재미를 배가합니다. 1막에서 몬테네로와 리골레토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패거리가 질다를 납치하는 장면, 서두에 묘사한 2막 2장 등이 그렇습니다. 소극장 연극에서 자주 쓰이는, ’연극적 약속‘을 활용한 연출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질다가 만토바 공작 대신 죽기로 마음먹고 막달레나의 가게 문을 두드리는 3막 6장이 대표적입니다. 막달레나와 스파라푸칠레가 있는 가게 안과 질다가 있는 가게 밖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의 투명 벽을 상상하게 합니다. 질다가 가게 문을 두드리는 동작을 취할 때 오케스트라 피트 석의 엘렉톤이 그 효과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냅니다. 이들 세 명이 관객을 바라보며 부르는 3중창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리골레토입니다. 척추장애인이 아니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지닌 인물로 나옵니다. 연출가는 노트에서 “외모지상주의 현대사회의 코드로 재해석했다”고 했는데 막상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 누구나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어서 그만큼의 효과를 거뒀는지는 의문입니다. 2막 3장에서 “랄라~ 랄라~”를 반복하면서 걷는 장면은 '작곡가가 꼽추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비장한 느낌이 살지 않았습니다. 음향시설이 썩 좋지 않은 공연장 환경과 소편성 탓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음악과 무대의 시너지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극적 감동을 더할 음악적 감동은 크지 않았습니다.
중극장인 공연장 무대구조를 잘 활용한 연극적 연출의 완성도를 높인 건 ‘배우’들이었습니다. ‘믿고 보는’ 리골레토 역의 양준모를 비롯해 질다 역의 이혜정, 만토바 공작 역의 이명현은 뛰어난 가창과 몰입도 높은 연기로 객석의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코러스를 맡은 마에스타오페라합창단의 젊은 단원들도 합창뿐 아니라 연출이 요구하는 연기를 잘 소화해냈습니다. 깔끔한 자막 번역도 칭찬해줄 만 합니다. 드라마를 잘 드러낸 연출과 함께 ‘리골레토’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도 너무나 극적이어서 자칫하면 흐름을 놓치기 쉬운 내용을 잘 따라갈 수 있게끔 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몇몇은 무대 중앙에 세로로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 탁자에 올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군무와 합창을 리드합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나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는데” 하며 순수한 그녀(질다)를 납치해 눈물 흘리게 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던 만토바 공작은 패거리들을 마주 보고는 신이 나서 군무를 지휘하는 코치처럼 같은 춤을 춥니다.
지난 1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 서울시오페라단의 ‘리골레토’ 마지막 공연 현장입니다. 관객이 1막 후반부에서 봤던 내용을 노래로 되풀이하기에 정적으로 연출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섬뜩하게 펼쳐냅니다. 이번 무대를 연출한 장서문은 연출 노트에 “인간이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마치 벌레같이 혐오스럽고 본능에 충실한 동물적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썼는데 그럴듯합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코러스 개개인의 표정들에서 약자를 무리 지어 괴롭히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집단 광기마저 느껴졌습니다.
이전 ‘리골레토’ 무대에서 볼 수 없던 코러스 연출과 연기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주로 대극장 무대에 올려진 ‘리골레토’를 중극장에서 본 것도 처음입니다. 서울시오페라단은 베르디 오페라 중 가장 극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리골레토’를 600석 규모의 M씨어터에 맞게 제작했습니다. 이 공연장에서 2020년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를 올린 장서문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정주현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더 피니가 공연장 규모와 좁은 피트 석에 맞춰 20여 명의 소편성으로 연주했습니다. 나흘간 열린 공연 중 마지막 날에는 B팀인 양준모(리골레토), 이혜정(질다), 이명현(만토바 공작), 박준혁(스파라푸칠레), 전태현(몬테로네), 임은경(막달레나) 등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대 오페라 공연의 트렌드는 대본과 음악은 거의 그대로 두면서 시·공간적 배경은 원작과 아예 달리하는 것입니다. 원작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살리는 무대가 요즘은 더 드문 것 같습니다. 이번 공연도 이런 흐름을 따라갑니다. 현대적이고 상징적인 무대 연출과 동시대의 감성으로 ‘리골레토’를 재조명하고, 재해석했습니다. 1막 배경부터 19세기 이탈리아 만토바 궁정이 아니라 요즘의 상류층 비밀 사교 클럽 같습니다. 복장도 요즘의 것입니다. 무대 양쪽에 클럽 분위기와 썩 어울리는 벽면 거울 세트가 비스듬히 위치합니다. 이 거울 세트는 1막뿐 아니라 2막과 3막에도 각도를 달리하며 등장인물들을 비춥니다. 객석 중앙에 자리 잡은 관객이라면 리골레토와 질다, 만토바 공작이 아리아를 부를 때 무대의 실제 모습과 양면 거울에 비친 모습 등 세 가지 각도에서 등장인물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비친 모습뿐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인물의 내면에 좀 더 다가가게 합니다. 질다의 방을 새장처럼 표현한 연출도 효과적입니다. 리골레토의 과도한 보호막에 갑갑해하는 질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역동적인 연극적 기법과 연출이 극적 재미를 배가합니다. 1막에서 몬테네로와 리골레토가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패거리가 질다를 납치하는 장면, 서두에 묘사한 2막 2장 등이 그렇습니다. 소극장 연극에서 자주 쓰이는, ’연극적 약속‘을 활용한 연출도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질다가 만토바 공작 대신 죽기로 마음먹고 막달레나의 가게 문을 두드리는 3막 6장이 대표적입니다. 막달레나와 스파라푸칠레가 있는 가게 안과 질다가 있는 가게 밖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의 투명 벽을 상상하게 합니다. 질다가 가게 문을 두드리는 동작을 취할 때 오케스트라 피트 석의 엘렉톤이 그 효과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냅니다. 이들 세 명이 관객을 바라보며 부르는 3중창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리골레토입니다. 척추장애인이 아니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지닌 인물로 나옵니다. 연출가는 노트에서 “외모지상주의 현대사회의 코드로 재해석했다”고 했는데 막상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 누구나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어서 그만큼의 효과를 거뒀는지는 의문입니다. 2막 3장에서 “랄라~ 랄라~”를 반복하면서 걷는 장면은 '작곡가가 꼽추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작곡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비장한 느낌이 살지 않았습니다. 음향시설이 썩 좋지 않은 공연장 환경과 소편성 탓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음악과 무대의 시너지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극적 감동을 더할 음악적 감동은 크지 않았습니다.
중극장인 공연장 무대구조를 잘 활용한 연극적 연출의 완성도를 높인 건 ‘배우’들이었습니다. ‘믿고 보는’ 리골레토 역의 양준모를 비롯해 질다 역의 이혜정, 만토바 공작 역의 이명현은 뛰어난 가창과 몰입도 높은 연기로 객석의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코러스를 맡은 마에스타오페라합창단의 젊은 단원들도 합창뿐 아니라 연출이 요구하는 연기를 잘 소화해냈습니다. 깔끔한 자막 번역도 칭찬해줄 만 합니다. 드라마를 잘 드러낸 연출과 함께 ‘리골레토’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도 너무나 극적이어서 자칫하면 흐름을 놓치기 쉬운 내용을 잘 따라갈 수 있게끔 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