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행사에선 한 세션당 8개 내외의 초기 스타트업이 피칭 발표를 진행하고 멘토들의 날카로운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현주소를 짚을 수 있어 행사장엔 수많은 관람객이 북새통을 이뤘지만, 업체별로 Q&A가 이루어진 시간은 10분 내외로 짧아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한경 긱스(Geeks)가 주요 심사단 3인을 다시 찾아 그들의 못다 한 얘기를 물었습니다. 해외에서 온 유일한 업계 인사였던 슈오 왕 딜 공동창업자 겸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 그리고 내국인 멘토인 정현경 뮤직카우 대표, 이승규 더핑크퐁컴퍼니 공동창업자 겸 부사장은 “요즘 젊은 창업가들의 ‘디테일’에 놀랐다”면서도, 투자 혹한기 속에서 “프레젠테이션(PT) 능력과 고용 상황 점검은 버티기의 핵심”이란 공통된 당부를 남겼습니다.
'대륙별 1인', 초기부터 글로벌 진출하라
딜은 2019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인사관리(HR) 스타트업입니다. 각국의 노무 규정을 전자 계약서 형태로 갖추고, 국가 간 근로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운영합니다. 지난해 10월 진행한 시리즈D 라운드에서 4억2500만달러(약 56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며 6조원 상당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대어’입니다. “와이콤비네이터(YC) 선정 당시 발표가 생각납니다.” 2019년 YC의 초기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선정을 통해 글로벌 업체로 성장한 딜의 슈오 왕 CRO는 당시 유니콘 톡과 비슷한 발표를 거쳤다고 했습니다. “8주 동안 준비했던 PT를 발표 5일 전에 전부 수정했었는데, 이런 현장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소회했습니다.컴업 현장을 처음으로 방문한 슈오 CRO는 첫날 6개 초기 스타트업의 피칭을 보고 멘토링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스타트업으로 ‘디플에이치알’을 꼽았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제품 포지셔닝 실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포항공대 재학생 4명이 설립한 디플에이치알은 커뮤니티 기반 생산·기능직 전문 채용 플랫폼 ‘고초대졸닷컴’을 운영합니다. 4년제 대학 졸업자와 사무직을 다루던 기존 구직 플랫폼에서 벗어난 전략으로 올해 1월 설립 한 달 만에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AC) 블루포인트파트너스로부터 시드(초기)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슈오 CRO는 “자신들이 어떤 영역의 고객을 타깃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속해 있는 시장에 대한 조사와 이해도가 굉장히 수준 높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가격 책정 모델까지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은 비즈니스 모델의 성숙도를 엿볼 수 있는 척도”라고 짚었습니다. ‘돈 버는 스타트업이 생존한다’는 말은 글로벌 창업가의 시각에도 유효했습니다. 영상 편집 솔루션 스타트업 브이로거 역시 가격 책정 전략이 뛰어나서 함께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슈오 CRO는 고등학교 때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 메사추세츠공과대(MIT)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가 2015년 창업한 공기청정기 업체 에어리스클린텍이 가정용 로봇업체 아이로봇에 인수된 건은 미국 ‘더리봇리포트’의 주목할 만한 인수합병 ‘TOP 10’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두 번의 창업 성공의 기반은 글로벌에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초기부터 확장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 선정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가 멘티 스타트업들에 남기는 당부입니다. 구체적 실행방법에 대해선 ‘대륙별 1인 전략’을 언급했습니다. 슈오 CRO는 “초기 스타트업이 해외 인력을 채용하기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아주 가벼운 수준의 투자만 해보자는 것이다”며 “딜은 초창기 대륙당 하나의 영업 직원을 두고 스스로 성과지표를 설정하게 한 다음, 현지에서 오는 피드백을 경영진이 함께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딜은 이런 작업을 창업 첫 해에 시작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일 정도로 힘은 들었지만, 크게 자원들 들이지 않고 시작했기 때문에 부담은 적었습니다. 이 경우 어떤 인력을 채용하냐는 관건이 됐습니다. 그는 유럽 권역의 영국 직원을 우수 인물로 꼽았는데, 이유는 주체성이었습니다.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해도 강한 소속감을 갖고 조직과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을 골랐고, 이는 영국 근무 인원이 40명 규모까지 불어난 기반이 됐습니다.
그는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습니다. ‘스케일업’의 방식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에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자세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사용자와의 접점이 많은 제품과 플랫폼을 만드는 것입니다. 슈오 CRO는 “아마존은 책을 팔다가 여러 상품을 추가하더니, 이커머스 공룡이 되고 클라우드 사업까지 한다”며 “고객의 행동을 ‘풀 커버리지’로 바꿔낼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최근 투자 혹한기로 초기 창업가가 버티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럴 때일수록 과대 고용을 경계하고 투자 유치를 해외에서 끌어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스타트업, 성장 이후의 채용 '빈자리' 필요
정현경 뮤직카우 대표의 컴업 등장은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연초 스틱인베스트먼트로부터 80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후 저작권료 참여 청구권의 증권성 여부 문제가 대두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지난 9월 규제 특례가 부여되는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되며 재도약을 노리는 정 대표의 움직임은 지식재산권(IP) 투자시장의 가능성과는 별개로, 격랑과 곡절을 헤쳐가는 초기 창업가의 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 금융위원회의 투자계약증권 판단 이후 줄곧 언론 인터뷰를 고사하던 정 대표는 올해 컴업이 끝난 뒤 기자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후배 창업가들을 위한 조언을 내놓았습니다. “압축적인 PT를 만들어라”와 “성장 이후의 채용 여력을 남겨두어라” 등은 그가 초기 스타트업을 위해 보태고 싶은 말들입니다.“창업했을 때는 어딜 가든 최연소였어요. 1999년,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는데 ‘벤처기업’이라고 불렀죠. 20년이 지나고 보니, 이젠 더 어린 창업가들이 활약하고 있더라고요.” 정 대표는 “컴업에 가보니, 이제는 40대 창업이 더 희귀해져 버렸다”며 웃었습니다. 그는 창업가 연령이 어려지는 상황을 고무적이라 진단했습니다. “과거 벤처 1세대가 1000억원짜리 기업을 일궈내고 인정받았다면, 요즘은 1조원 이상 유니콘기업은 돼야 한다”며 “스타트업 생태계가 그만큼 성장하고, 도전자도 많아졌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 대표는 행사 이튿날 6개 초기 스타트업을 만나 멘토링을 진행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스타트업으론 스퀴즈비츠와 우주문방구를 꼽았습니다. 스퀴즈비츠는 지난 3월 설립된 인공지능(AI) 경량화 솔루션 스타트업입니다. 네이버의 기업형 액셀러레이터(AC) D2SF가 투자한 곳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정 대표가 선배 창업가로서 눈여겨본 기준은 ‘PT 능력’과 ‘독창성’이었습니다. 그는 “10분 미만 PT가 모든 PT 중에 가장 힘든 형태”라며 “창업자는 대게 발표 때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불필요한 내용을 과감히 쳐내고 ‘스토리’를 부여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병렬형 전개를 피하고, 흡입력 있는 주제 하나에 집중해 PT 목적에 따른 생산성을 극대화하라는 것이 조언의 핵심입니다. 단시간 안에 불특정 다수에게 어려운 비즈니스 모델을 쉽게 풀어낸 스퀴즈비츠가 컴업 발표에서 정 대표에게 합격점을 받은 이유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표현처럼, 대부분 스타트업은 기존 시장을 꼼꼼하게 조사하고 이를 기반해 혁신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는 반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첨언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주문방구는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주문방구는 콘텐츠 세계관을 참여자가 공동으로 창작하는 독특한 플랫폼 ‘스토리네이션’을 운영합니다. “뮤직카우도 같았어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을 찾기 위해 5년 동안 혼자 8강, 4강, 결승까지 하면서 많이 헤맸습니다. 음원 IP가 새로운 투자자산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는 데 걸린 시간입니다.” 푸드테크, 슬립테크 사업도 알아보며 고군분투했다는 정 대표는 우주문방구를 보며 자기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국내엔 똑똑한 창업가가 많아서, 후발주자가 금방 나와서 경쟁한다”며 “이질적인 분야를 융합해 독특한 아이템을 만들고, 진입장벽을 높이면 좋다”고 했습니다.
정 대표는 지금이 ‘창업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했습니다. 4월 금융당국의 판단 이래, 뮤직카우는 현재까지 투자자 보호 장치 마련을 요구받아 새 상품을 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은 다르지만, 투자 혹한기를 거치고 있는 초기 창업가가 가지는 압박을 비슷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는 동력으로 인재 채용의 완급 조절을 꼽았습니다. 비용이 소모되니 사람을 많이 뽑지 말라는 조언과는 다릅니다. 뮤직카우는 지난해 40명에서 올해 인원이 80명까지 늘었습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전문인력 채용과 함께, 올해 초 2000억원 투자유치에 성공한 만큼 기본 인력 자체도 늘리기로 했습니다. 정 대표는 “스타트업이 적정 규모를 넘어서면 뛰어난 인재를 더 쉽게 채용할 수 있게 된다”며 “뮤직카우가 40명 상당 적은 인력을 유지했던 이유도 필요할 때 기존 조직과 마찰 없이 사람을 늘리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정 대표의 좌우명은 새옹지마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너무 깊이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도, 초기 창업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입니다. 뮤직카우는 현재 금융당국에 투자자 보호 이행 사항을 보고하고, 최종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은 수익이 핵심…지원 사업으로 기반 다지기
“피보팅(방향 전환)에 대한 결정이 섰다면,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운’을 만날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핑크퐁과 아기상어’는 더핑크퐁컴퍼니에 유튜브 ‘루비 버튼(구독자 5000만 명 달성)’을 안긴 글로벌 히트작입니다. 3인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이승규 더핑크퐁컴퍼니 부사장도 창업 첫해인 2010년에는 그저 작은 스타트업의 일원이었습니다. “처음엔 초등학생을 타깃으로 한 학습용 앱을 만들었어요. 미취학 아동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로 결정했을 땐 사업 모델 전체를 과감히 바꿨습니다. 2012년부터 바로 매출액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매출액을 내는 일에선 대부분 창업가가 진통을 겪습니다. 컴업 심사위원석에서 창업자를 만난 이 부사장도 초기엔 ‘반년 뒤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할 만큼 돈이 바닥나겠구나’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핑크퐁의 첫해 매출은 3억원이었습니다. 컴업에서 초기 창업자를 멘토링 할 때도, 그는 수익화 고민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부사장이 현재까지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콘텐츠 산업을 기준으로 하면, 더핑크퐁컴퍼니의 일은 본질적으로 ‘흥행업’에 속한다”며 “즐거움과 감동은 수치로 계량하기 어려운 만큼 운이 크게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운을 만날 기회를 늘리는 것”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더핑크퐁컴퍼니가 히트작을 기반으로 영화‧애니메이션‧음원‧공연‧게임 등 전방위로 사업을 늘리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모험을 펼 때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더핑크퐁컴퍼니의 운명을 갈랐던 계기는 2015년 자사 콘텐츠를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하면서였습니다. 그는 “‘매출 캐니벌라이제이션(새로운 시도가 기존 매출액을 줄이는 현상)’ 우려도 강했다”며 “결국은 새로운 트렌드, 운과 노력의 절묘한 조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모험 기반은 정부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의 지원 프로그램에서 적극적으로 탐색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더핑크퐁컴퍼니도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의 도움으로 파트너사를 발굴하고 방송국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계약을 체결했다”며 “서비스 운영 고도화, 신규 이용자 확보, 해외 진출 기회 등이 한 번에 찾아올 수 있으니 업체에 맞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참 한 가지 더
글로벌 스타트업 축제 'BIG 4'를 아시나요 국내에 ‘컴업’이 있듯, 해외에는 저마다를 ‘세계 최대’로 수식하는 스타트업 콘퍼런스가 있습니다. 세계 4대 스타트업 행사로 불리는 ‘테크크런치 디스럽트’ ‘웹 서밋’ ‘비바테크놀로지’ ‘슬러시’가 그것입니다.
북미 최대 스타트업 행사 테크크런치 디스럽트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 유명 창업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린 유명 행사입니다. 올해 행사는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최우수 스타트업을 가리는 ‘배틀필드’ 섹션은 행사의 핵심으로 평가됩니다.
프랑스의 비바테크놀로지(비바테크)는 지난 6월 열렸습니다. 2000개가 넘는 기업 전시가 펼쳐지며 9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자주 방문하는 행사입니다. 포르투칼의 웹 서밋은 이달 수도 리스본에서 열렸습니다. 전체적인 규모는 비바테크과 비슷합니다. 슬러시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립니다. 대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시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