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엔 썩은 생선, 코엔 개구리…법조인의 '굴욕'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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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원픽 화가'
남들이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그릴 때
그는 왜 이렇게 이상한 작품을 그렸을까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원픽 화가'
남들이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그릴 때
그는 왜 이렇게 이상한 작품을 그렸을까
‘고전 미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종교를 소재로 한 장엄한 그림이나 하얀 대리석 조각을 떠올리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천지 창조)나 ‘피에타’처럼요. 미술 교과서에서도 많이 봤고, 정말 아름답고, 훌륭하고, 실제로 보면 깊은 감동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좀 지루하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고전이 대체로 그렇죠. 마크 트웨인은 고전(서적)에 대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 출신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의 작품들을 보면 이런 생각은 확 달라집니다. 예컨대 ‘법률가(The Jurist)’라는 이 그림에서 작가는 고기와 생선으로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음식들은 좀 상한 것처럼 보이는데, 생선 대가리로 된 입이 가관이네요. 코와 미간은 목을 제거한 개구리로, 옆 얼굴은 통닭으로, 몸은 법률 문서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는 생전 법조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과일과 동식물 등 여러 소재를 조합해 사람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합성 초상화’). 모양만 맞춘 것도 아니고 얼굴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나에 나름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남들이 ‘최후의 만찬’ 같은 그림을 그릴 동안, 그는 어쩌다 이렇게 기발하면서도 기괴한 그림을 그리게 된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아르침볼도의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조명합니다.
아르침볼도는 마침 밀라노에 새로 부임한 대주교, 말하자면 새로 온 거래처 사장과 궁합이 안 맞던 차였습니다. 대주교가 그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데다 유머 감각도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지금으로 따지면 ‘글로벌 1등 대기업’에서 불러주니 감사했겠죠. 아르침볼도는 바로 짐을 쌌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도 아르침볼도는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실력이 검증된 데다, 외국인이었거든요. 당시에는 궁정에 외국 예술가 하나쯤 두는 게 멋이었습니다. 요즘 기업에도 외국인 임원이 있으면 왠지 글로벌해 보이는 것처럼요. 원래 괴짜 기질이 있던 아르침볼도에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환상적인 직장이었습니다. 왕가의 박물관에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긁어모은 최고의 그림들은 물론이고 온갖 공예품, 동·식물들이 즐비했죠. 아마도 그는 박물관에서 전 세계의 여러 아름답고 기이한 문물을 접하며 영감을 키웠을 겁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 외에도 장식가, 의상 디자이너, 파티 플래너 등으로도 일했죠. 자신을 불러준 페르디난트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가 즉위(1563)하자, 그는 ‘끼’를 폭발시킵니다.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연작은 1563년 아르침볼도가 막시밀리안 2세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초상화입니다. 봄은 꽃으로 만든 미소 짓는 여성, 여름은 제철 과일과 채소로 만든 웃는 얼굴, 가을은 잘 익어서 터질 듯한 과일 등 작물로 만든 남자를, 겨울은 나무 등으로 만든 노인을 보여줍니다. 1566년 작 ‘4원소’는 물, 불, 공기, 땅을 주제로 했습니다. 물은 생선 등 해양 생물로, 불은 나무와 대포로, 공기는 새로, 땅은 육지 동물로 표현했죠. 약간 징그럽기도 한데, 동·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막시밀리안 2세는 작품들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이 그림들이 ‘회심의 아부’였다는 점입니다. 사계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세가 세계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강하다”는 의미를, 4원소는 “막시밀리안 2세는 자연까지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아 그렸거든요. 예컨대 ‘불’ 등 곳곳에는 황실의 상징이 들어가 있고, ‘겨울’에는 황제의 옷장에 실제로 있는 옷을 입힌 뒤 이니셜인 ‘M’을 위에 썼습니다.
잘 그렸고, 참신하고, 재미있고, 자신의 위엄까지 드러내는 이 작품들을 막시밀리안 2세는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2년 뒤(1571) 축제에서 황제와 궁정 식구들이 그림과 비슷하게 차려입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 장 그리게 시켜서 여기저기 선물로 보내기도 했죠. 아르침볼도가 아첨만 잘했던 건 아닙니다. ‘사서(The Librarian)’는 같은 해 그린 ‘법학자’처럼 일종의 비판 의식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몸, 머리, 머리카락은 책으로 이뤄져 있고 옷은 커튼으로 돼 있죠. 딱딱한 책 가장자리 때문에 인물은 마치 로봇처럼 보입니다. 학자와 엘리트를 조롱했다,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는 부자들을 비판했다는 등의 설이 있습니다. 그의 기법은 갈수록 발전합니다. ‘그릇에 담긴 야채, 혹은 정원사(Vegetables In A Bowl Or The Gardener)’를 보시죠. 왼쪽 그림은 약간 독특한 정물화지만, 180도 뒤집으면 오른쪽 그림처럼 정원사의 얼굴이 됩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그리스 신인 프리아포스를 표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구이 요리, 혹은 요리사 ‘The Cook’(1570)도 그런 작품입니다만 조금 더 무섭네요.
30년이나 궁정화가로 지낸 아르침볼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예순 넘으면 오래 산 거였죠. 이제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잘 안 움직이는데, 고향에서 좀 쉬고 싶어진 아르침볼도는 1592년 밀라노로 돌아갑니다. 루돌프 2세는 오랫동안 고생해준 아르침볼도에게 귀족 작위(팔라티노 백작)와 함께 퇴직금 조로 많은 돈을 쥐여줍니다. 다만 이 돈을 쓸 시간은 없었죠. 1년 뒤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래도 유럽에서 제일가는 궁정에서 마음껏 예술혼을 불태우다 갔으니, 예술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20여점에 불과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관하던 프라하 수장고가 30년 전쟁(1618~1648) 때 스웨덴군에 대량으로 약탈당했거든요. 그 탓에 작품 상당수가 유실되고, 남아있는 그림도 전 유럽에 흩어져 있습니다.
스웨덴 등 상대적인 ‘미술 변방’에 흩어져 있어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은 20세기 들어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조명됩니다.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물론 파블로 피카소 등 다른 거장들도 아르침볼도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를 ‘초현실주의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미술이라고 하면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이상한 그림들도 있었고, 또 황제들이 이를 엄청나게 좋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세계 미술계를 지배하는 서양미술의 힘도 이런 다양성에서 나왔겠죠. 아르침볼도처럼 남들과 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이를 배척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준 막시밀리안 2세같은 이들 덕분에 창의성이 꽃피고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재기와 유머가 넘치는 그의 작품들이 여러분께도 영감을 줬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는 이렇게 과일과 동식물 등 여러 소재를 조합해 사람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합성 초상화’). 모양만 맞춘 것도 아니고 얼굴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나에 나름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남들이 ‘최후의 만찬’ 같은 그림을 그릴 동안, 그는 어쩌다 이렇게 기발하면서도 기괴한 그림을 그리게 된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아르침볼도의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조명합니다.
이탈리아의 괴짜 화가, 합스부르크 궁정으로
아르침볼도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에서 성당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근 지역의 성당 벽화와 천장화 등을 그렸습니다. 뛰어난 실력 덕분에 점점 유명해졌고, 30대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까지 명성이 닿았죠. 왕가는 1562년 아르침볼도를 페르디난트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정화가로 초청합니다.아르침볼도는 마침 밀라노에 새로 부임한 대주교, 말하자면 새로 온 거래처 사장과 궁합이 안 맞던 차였습니다. 대주교가 그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데다 유머 감각도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지금으로 따지면 ‘글로벌 1등 대기업’에서 불러주니 감사했겠죠. 아르침볼도는 바로 짐을 쌌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입장에서도 아르침볼도는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실력이 검증된 데다, 외국인이었거든요. 당시에는 궁정에 외국 예술가 하나쯤 두는 게 멋이었습니다. 요즘 기업에도 외국인 임원이 있으면 왠지 글로벌해 보이는 것처럼요. 원래 괴짜 기질이 있던 아르침볼도에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환상적인 직장이었습니다. 왕가의 박물관에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긁어모은 최고의 그림들은 물론이고 온갖 공예품, 동·식물들이 즐비했죠. 아마도 그는 박물관에서 전 세계의 여러 아름답고 기이한 문물을 접하며 영감을 키웠을 겁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 외에도 장식가, 의상 디자이너, 파티 플래너 등으로도 일했죠. 자신을 불러준 페르디난트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가 즉위(1563)하자, 그는 ‘끼’를 폭발시킵니다.
천재적인 재능, 꽃피다
1569년 1월 1일, 막시밀리안 2세에게 새해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아르침볼도가 선물로 그림 몇 점을 내밉니다. 웃으며 그림을 받아서 본 황제, 순간 눈이 커지더니 이내 ‘빵’ 터집니다. “하하, 마음에 쏙 드는구먼. 이런 그림을 앞으로 자주 그려 주게.”‘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연작은 1563년 아르침볼도가 막시밀리안 2세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초상화입니다. 봄은 꽃으로 만든 미소 짓는 여성, 여름은 제철 과일과 채소로 만든 웃는 얼굴, 가을은 잘 익어서 터질 듯한 과일 등 작물로 만든 남자를, 겨울은 나무 등으로 만든 노인을 보여줍니다. 1566년 작 ‘4원소’는 물, 불, 공기, 땅을 주제로 했습니다. 물은 생선 등 해양 생물로, 불은 나무와 대포로, 공기는 새로, 땅은 육지 동물로 표현했죠. 약간 징그럽기도 한데, 동·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막시밀리안 2세는 작품들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이 그림들이 ‘회심의 아부’였다는 점입니다. 사계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세가 세계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강하다”는 의미를, 4원소는 “막시밀리안 2세는 자연까지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아 그렸거든요. 예컨대 ‘불’ 등 곳곳에는 황실의 상징이 들어가 있고, ‘겨울’에는 황제의 옷장에 실제로 있는 옷을 입힌 뒤 이니셜인 ‘M’을 위에 썼습니다.
잘 그렸고, 참신하고, 재미있고, 자신의 위엄까지 드러내는 이 작품들을 막시밀리안 2세는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2년 뒤(1571) 축제에서 황제와 궁정 식구들이 그림과 비슷하게 차려입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 장 그리게 시켜서 여기저기 선물로 보내기도 했죠. 아르침볼도가 아첨만 잘했던 건 아닙니다. ‘사서(The Librarian)’는 같은 해 그린 ‘법학자’처럼 일종의 비판 의식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몸, 머리, 머리카락은 책으로 이뤄져 있고 옷은 커튼으로 돼 있죠. 딱딱한 책 가장자리 때문에 인물은 마치 로봇처럼 보입니다. 학자와 엘리트를 조롱했다,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는 부자들을 비판했다는 등의 설이 있습니다. 그의 기법은 갈수록 발전합니다. ‘그릇에 담긴 야채, 혹은 정원사(Vegetables In A Bowl Or The Gardener)’를 보시죠. 왼쪽 그림은 약간 독특한 정물화지만, 180도 뒤집으면 오른쪽 그림처럼 정원사의 얼굴이 됩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그리스 신인 프리아포스를 표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구이 요리, 혹은 요리사 ‘The Cook’(1570)도 그런 작품입니다만 조금 더 무섭네요.
‘이상한 왕’ 루돌프 2세, 아르침볼도를 총애하다
1576년 막시밀리안 2세의 뒤를 이어 루돌프 2세(1552~1612)가 즉위합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가장 특이한 황제였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회성이 부족했고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죠. 평화로운 시대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종교 갈등과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무능한 왕으로 낙인찍힌 그는 훗날 동생인 마티아스 대공에게 대부분의 권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 측면에서 보면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술과 과학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요하네스 케플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와 예술가들을 프라하 궁정(1583년 빈에서 프라하로 천도)으로 모았죠. 뒤러,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당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진귀한 공예품들도 수집했습니다. 그가 모은 보물들은 오늘날 빈미술사박물관에 있습니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루돌프 2세. 당연히 아르침볼도를 매우 아꼈습니다. 작가는 그림으로 보답했습니다. ‘플로라’(1589)를 보시죠. 위 작품들보다 재미는 좀 덜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균형 잡히고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잊혔던 화가, 300년 지나 부활
‘베르툼누스’(1590~1591)는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루돌프 2세의 초상화를 과일과 채소로 그린 건데, 양파, 옥수수, 올리브, 아티초크, 호박, 양배추, 사과, 배, 포도, 밤, 무화과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조합했습니다. 루돌프 2세의 뛰어난 능력으로 나라가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누리게 됐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요.30년이나 궁정화가로 지낸 아르침볼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예순 넘으면 오래 산 거였죠. 이제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잘 안 움직이는데, 고향에서 좀 쉬고 싶어진 아르침볼도는 1592년 밀라노로 돌아갑니다. 루돌프 2세는 오랫동안 고생해준 아르침볼도에게 귀족 작위(팔라티노 백작)와 함께 퇴직금 조로 많은 돈을 쥐여줍니다. 다만 이 돈을 쓸 시간은 없었죠. 1년 뒤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래도 유럽에서 제일가는 궁정에서 마음껏 예술혼을 불태우다 갔으니, 예술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20여점에 불과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관하던 프라하 수장고가 30년 전쟁(1618~1648) 때 스웨덴군에 대량으로 약탈당했거든요. 그 탓에 작품 상당수가 유실되고, 남아있는 그림도 전 유럽에 흩어져 있습니다.
스웨덴 등 상대적인 ‘미술 변방’에 흩어져 있어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은 20세기 들어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조명됩니다.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물론 파블로 피카소 등 다른 거장들도 아르침볼도의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를 ‘초현실주의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미술이라고 하면 거기서 거기일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이상한 그림들도 있었고, 또 황제들이 이를 엄청나게 좋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세계 미술계를 지배하는 서양미술의 힘도 이런 다양성에서 나왔겠죠. 아르침볼도처럼 남들과 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이를 배척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준 막시밀리안 2세같은 이들 덕분에 창의성이 꽃피고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재기와 유머가 넘치는 그의 작품들이 여러분께도 영감을 줬기를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되는 기사로, 이번 기사는 17회째입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토요일마다 연재되는 기사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