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탈(脫)세계화 흐름이 빨라진 가운데 유럽연합(EU)과 미국의 관계가 더 두터워졌다는 주장이 나온다. 유럽은 러시아 대신 미국에서 에너지를 수입하고, 미국은 중국 대신 유럽에서 공산품을 들여온다는 분석이다.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올해 중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상품을 수입했다고 보도했다.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며 유럽산 공산품의 가격 경쟁력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을 통해 에너지 부족 위기를 맞은 유럽 제조업체가 되살아났다는 관측이 나온다.. 유럽의 대표적인 제조 강국인 독일의 9월 대(對)미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50% 이상 급증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유럽과 미국의 교역액이 급증했다. 미국이 EU(영국 포함)로부터 수입한 상품 규모는 1~2월 월간 420억달러를 맴돌았다. 지난 3월 537억달러로 치솟으며 중국(437억달러)을 앞질렀다. 이후 9월까지 500억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동량에서도 유럽은 중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공급망 분석업체 프로젝트 44에 따르면 지난 9월 유럽과 미국으로 오가는 물동량은 전년 동기 대비 10%가량 증대된 95만 3988TEU(1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를 기록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뉴저지 항의 물동량은 2019년보다 35% 늘어나며 미국에서 가장 붐비는 항구가 됐다.

유럽으로 향하는 미국인 관광객도 급증했다. 달러화 강세가 이어지고 유로화 가치가 쪼그라들며 나타난 현상이다. 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올해 1~7월 유럽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배가량 증가했다. 구찌, 입생로랑 등 프랑스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의 매출도 6~9월동안 74% 급증했다.

두 대륙 사이의 투자도 활성화됐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 7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이 미국에 외국인직접투자(FDI)를 한 금액은 3조 2000억달러로 전년 대비 13.5% 증가했다. 미국의 유럽에 대한 FDI 규모는 4조달러로 작년보다 10% 늘었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은 "유럽과 미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해졌다"며 "수치로 증명된다"고 했다.

마찰이 없는 건 아니다. EU는 미국이 지난 8월 발효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동맹국의 이권을 침해한다고 수차례 비판해왔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금지 조치에 유럽 각국이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각국이 해외 생산기지를 본국으로 다시 들여오는 ‘리쇼어링’을 추진하느라 빚어진 마찰이다.

베스타게르 집행위원은 "경제 모델이 재편되고 있다"며 "미국과 EU 두 지역의 기업들에 도움 될 신기술에 대한 글로벌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