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증권사는 냉소 대상이다. “직접 ABCP를 매입해주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도덕적 해이를 질타한다. “증권사는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많은 돈을 벌었으니 스스로 버틸 힘은 있다고 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증권사의 자구 노력이 먼저임을 강조한다.

주식 매매 중개. 증권사 본연의 전통 업무다. 부동산시장이 역대급 호황기를 맞자 핵심 수익원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으로 바뀌었다. 부동산 건설·개발사업은 장기간이 걸린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분양하는 데 3~5년은 기본이다. 투입하는 돈도 대규모다. 이걸 해결해주는 금융기법이 PF 대출이다. 돈이 필요한 건설업자와 돈을 가진 은행·보험사를 증권사가 중개했다. 건설사는 신용리스크가 커 차입 금리가 높다. 증권사가 묘수(?)를 찾았다. 장기 PF 대출을 3~6개월짜리 단기 PF-ABCP로 바꿨다. 건설사의 금리 부담을 낮췄다. 건설사-증권사의 공생관계는 이런 식으로 굳어졌다.

PF-ABCP 만기 도래 시 증권사는 새로 PF-ABCP를 발행해 갚는다. 이 시장에 위기가 닥쳤다. 금리가 연 20%를 돌파하고 상당수 건설사는 그 금리로도 차환 발행이 어려워졌다. PF-ABCP 발행 중개를 보증 선 증권사로 불이 옮겨붙었다. PF-ABCP 장사 수익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이제 곡소리가 들릴 차례다.

그런 일을 피하려고 1조8000억원 규모 ‘증권사 PF-ABCP 매입 프로그램’이 급조됐다. 1조8000억원 투입만으로는 근본 문제 치유가 어렵다. ABCP 시장의 ‘작은’ 충격이 자본시장을 ‘크게’ 때리는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전체 PF 시장에서 증권사 PF 유동화증권 비중이 2010년 말 9%에서 2022년 6월 25%로 늘어난 것이 그 증거다. PF 시장의 ‘자금 조달-운용 미스매치’ 행태는 금융위기의 단초가 될 소지가 크다. 차환금리가 급등하거나 ABCP 시장 유동성이 갑자기 줄면 중소형 증권사부터 연쇄 도미노 사태가 시작될 수 있다. 1980년대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집단 파산사태와 똑같다. 단기 조달 자금을 장기 부동산에 투자해 큰 재미를 봤다. 문을 닫은 저축대부조합이 3000개 이상이다. 국내총생산(GDP)의 8% 넘는 공적자금 5000억달러가 투입됐다.

대응 방안은 뭘까. 1조8000억원 채권안정펀드 조성은 일시적·단기적 조치일 뿐이다. 핵심은 ABCP 시장 유동성 리스크 통제다. 우선 유동성 공급 ‘저수지’를 늘려야 한다. 원칙은 수익자 부담이다. 리스크 발생을 부추긴 당사자가 합당한 만큼의 유동성을 미리 쌓는 것이다. PF 유동화증권 발행을 보증할 때 일부를 적립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증권사 간 합의로 별도 기구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볼 아이디어다. 능력이 안 되는 증권사는 PF-ABCP 보증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증권사 스스로 의연함·성숙함을 키울 때다. 정부는 5년 전 종합금융투자회사를 인가했다. 자기자본이 4조원 이상이다. 은행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췄다. 증권사는 이제 국내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SIFI)’이 됐다. 그런데 1조8000억원 정도의 채안펀드 조성도 업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당국 지휘를 받는다. 몸집은 미국 투자은행(IB)급으로 커졌는데 처신은 옛날 명동 사채업자 수준이다. 거래 중개로 구전이나 챙기는 브로커 행태에서 벗어날 때다. 시장 조성자(딜러)로 우뚝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