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書鏡(서경), 李彦迪(이언적)
[한시공방(漢詩工房)] 書鏡(서경), 李彦迪(이언적)
[원시]
書鏡(서경)


李彦迪(이언적)


觀書正吾心(관서정오심)
照鏡正吾貌(조경정오모)
書鏡恒在前(서경항재전)
須臾可離道(수유가리도)

[주석]
· 書鏡(서경) : 책과 거울.
· 李彦迪(이언적) :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이다. 조선 시대 성리학(性理學)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 주었다.
· 觀書(관서) : 책을 보다. / 正吾心(정오심) : 내 마음을 바로잡다.
· 照鏡(조경) : 거울에 비추다, 거울을 보다. / 正吾貌(정오모) : 내 모습을 바로잡다.
· 恒(항) : 항상, 늘. / 在前(재전) : 앞에 있다.
· 須臾(수유) : 잠시. / 可(가) : 어찌, 어떻게. / 離道(이도) : 도(道)를 떠나다.

[번역]
책과 거울

책을 보며 내 마음 바로잡고
거울 보며 내 모습 바로잡네
책과 거울이 늘 앞에 있으니
잠시인들 어찌 도를 떠나랴!

[번역노트]
책과 거울은 그 옛날 선비들의 사랑방이나 글방에 거의 예외 없이 있었던 물건들이다. 책이야 그렇다고 쳐도 거울은 왜? 라며 다소 의아해할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거울도 안 보는 여자>라는 노래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 선생이 <경설(鏡說)>이라는 글에서, “옛사람이 거울을 본 것은 그 맑음을 취하고자 함이었다.[古之對鏡 所以取其淸]”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옛날 선비들은 용모를 꾸미는 용도로 거울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타인이라는 거울에 어떻게 비칠까 하는 점을 염려하며, 인격 수양의 한 방편으로 거울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또 ≪묵자(墨子)≫에서는,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 모습만 볼 수 있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吉凶)을 알 수가 있다.[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 鏡於水 見面之容 鏡於人 則知吉與凶]”라고 하였다. 누군가를 거울삼는다는 것이, 자신을 바르게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신을 불행에 이르지 않게 해주는 수양임을 설파한 것이다.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사람도 거울이라는 경각심을 항상 일깨우기 위하여, 거울을 좌우명(座右銘)처럼 가까이에 두었을 옛 선비들의 일상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지 않는가!

그런데 어쩌다 거울이 책과 함께 짝이 된 것일까? 역자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제법 여러 날을 두고 짬이 날 때마다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다소 고민스러웠더랬다. 그렇게 좀은 미편(未便)한 마음으로 산보하던 어느 날, 문득 키워드 하나를 떠올렸다. 역자가 떠올린 키워드는 바로 “문질빈빈(文質彬彬)”이었다. 아! 그 순간에 어찌나 반갑던지, 하마터면 본인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이제 이 문질빈빈이라는 키워드로 역자의 생각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문질빈빈은 공자(孔子)께서, “바탕이 문채를 압도하면 촌스럽게 되고, 문채가 바탕을 압도하면 번지르르하게 되니, 문채와 바탕이 조화를 이룬 연후에야 군자답게 된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문질빈빈은 이처럼 문채와 바탕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빛난다는 뜻으로, 애초에는 몸가짐과 인품이 모두 아름다운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지만, 나중에는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역자가 이 성어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내 모습[吾貌]”은 외면(外面)이므로 곧 문채이자 형식이 되고, “내 마음[吾心]”은 내면(內面)이므로 바탕이자 내용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회재(晦齋) 선생의 이 시에서 책과 거울은 ‘나’를 도(道)에 머물게 하는 수단이자 방편이다. 책은 내 마음을 바로잡아주는 것이므로 그 내용이 중요하고, 거울은 내 모습을 바로잡아주는 것이므로 그 형식이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내용과 형식 가운데 내용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여, 형식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일견 타당한 듯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다음 예를 보기로 하자.

역자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에 제조한 맥주가 맛과 향이 매우 훌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맥주를 외국에 수출할 수 없었던 것은, 병입(甁入) 기술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우리 정부가 굴욕을 각오하고 일본에 그 기술 이전을 간청했으나 일본이 들어주지 않아, 우리의 맥주 수출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고 한다. 맥주로 얘기하자면, 술은 내용이고 병은 형식이다. 내용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담는 형식이 부실하다면 내용이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있으므로, 더 이상의 부언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회재 선생이 이 시에서 언급한 도(道)는 간단히 말해 선생이 추구하는 이데아(Idea)로 요약할 수 있다. 모습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만이 선생의 도인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중요한 측면의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책은 마음을 바로잡고, 거울은 모습을 바로 잡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책과 거울이 차별적이지만, ‘나’를 바로잡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질빈빈’의 문과 질의 경우처럼, 모습과 마음을 제대로 바로잡아 서로 어우러지도록 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는 책과 거울처럼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울만 보고 책은 거의 안 보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나마 거울을 보는 것도 수양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하다. 책의 경우는 어떠한가?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요즘은 수불석폰(手不釋phone: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음)이 시대의 풍속도(風俗圖)가 되었으니, 회재 선생께서 혹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무슨 말씀부터 먼저 꺼내실지 문득 궁금해진다.

역자가 오늘 소개한 이 시는 4구로 구성된 5언 고시(古詩)로 그 압운자는 ‘貌(모)’와 ‘道(도)’이다.

2022. 12. 6.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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