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일·대만·EU, 자국 반도체산업 지원에 사활 건 총력전
시설투자 세액공제 등 韓 반도체특별법 국회서 장기표류
전 세계가 반도체를 '무기'로 삼는 기술 안보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중 경쟁 심화와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반도체 산업은 경제뿐 아니라 국가 안보에 있어 핵심 자산으로 떠올랐다.
반도체가 안보에 직결되는 '실리콘 실드'(반도체 방패)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으로 공급망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 경쟁자들은 공급망을 재정비하는 등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 미국 중심 칩4 동맹에 맞서는 중국의 굴기
5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자국의 반도체 제조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월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만든 '반도체 칩과 과학법'(반도체법)에 서명했다.
반도체법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 유지를 위해 2천800억달러(366조원)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내 반도체 시설 건립 지원과 연구 등 반도체 산업에 520억달러(72조4천억원)를 지원하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는 25%의 세액 공제를 적용해준다.
미국은 지난 3월 한국·일본·대만 정부에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Chip) 4 동맹' 결성을 제안하는 등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가 강도를 더해갈수록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2030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목표로 삼아 '반도체 항모'로 불리는 칭화유니(淸華紫光)를 비롯해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中芯國際·중신궈지)와 2위 파운드리 업체 화훙(華虹) 반도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방 정부들도 앞다퉈 자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현금 인센티브와 정책 지원을 내놓고 있다.
외국 기업의 생산 공장 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세계 1위 업체인 TSMC를 보유한 대만은 현재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첨단산업을 위주로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복귀) 지원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 보조금 투입 등 자국내 산업 강화 정책도 수립했다.
반도체 산업 부활을 꿈꾸는 일본은 작년 11월 반도체 공장의 자국내 입지 지원을 포함한 '반도체 산업 기반 긴급 강화 패키지'를 발표하고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 시설의 자국 유치를 앞장서 추진 중이다.
EU도 올해 2월 '유럽 반도체법'을 발의, 2030년까지 민관 투자를 통해 430억 유로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EU 비중을 현재의 9%에서 최소 20% 수준으로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 메모리 강한 K반도체 시스템 부문은 최하위권
이처럼 글로벌 각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는 가운데 향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며 메모리 반도체 1위 국가인 우리나라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근 산업연구원(KIET)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반도체 산업의 종합 경쟁력을 분석한 결과 미국(96)이 가장 높고 대만(79), 일본(78), 중국(74), 한국(71), EU(66)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87)에서는 높은 경쟁력을 평가받았으나 시스템반도체(63)는 비교 대상국 중 최하위로 평가됐으며, 종합 평가에서도 6개 조사 대상국 중 5위에 그쳤다.
2020년 조사와 비교하면 1년 만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순위가 뒤바뀌었다.
2020년 5개 국가 대상 조사에서는 미국(93.4)이 1위였고, 일본(78.4), 대만(75.1), 한국(68.6), 중국(64.3) 순이었다.
'K반도체'가 말 그대로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파운드리는 대만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다.
대만의 TSMC는 사상 처음으로 올해 3분기 세계 반도체 매출에서 삼성전자를 추월하고 1위 자리에 올랐다.
TSMC는 종합반도체(IDM) 업체인 삼성전자보다 수익성이 우수하고 위탁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시황에 덜 민감하다.
메모리 반도체가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과 대비된다.
전방 산업의 수요가 첨단 산업 위주로 바뀌면서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등 고성능 분야에서 견조한 수요를 보이고 있다. 반면 한국의 주력인 메모리 분야는 중국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인력을 빼가며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어 머지않아 추격을 허용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D램의 경우 과거보다 업계 간 기술 격차가 급격히 줄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3강이 14나노급 공정에 머물고 있어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중국의 추격을 피하기 힘들 수도 있다.
반도체 산업 구조상 다수의 반도체 원천 기술을 보유한 미국과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노선을 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각국 정부의 지원 정책과 주요 반도체 기업의 투자 계획 등을 종합하면 대략 2025년을 기점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공급망이 재편되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위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진다"고 분석했다. ◇ 한국형 '실리콘 실드' 구축 총력 쏟아야
업계에서는 메모리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한국형 실리콘 실드' 구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윤정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최근 제3차 미래전략포럼에서 "기술 주권과 반도체 안보를 강화하려면 '한국형 반도체 방패'를 확보해야 한다"며 "압도적 경쟁 우위를 토대로 협상력을 갖는 품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국무회의에서 "반도체는 국가 안보 자산이자 우리 산업의 핵심이고 전체 수출액의 20%를 차지하는 우리 경제의 근간"이라며 "반도체 산업이 지금의 경쟁력을 향후에 더 확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 제도적 여건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도체 시설투자 기업의 세액 공제율을 최대 30%까지 늘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과 일명 'K칩스법'으로 불리는 '국가첨단전략산업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여전히 국회에 표류 중이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을 맡은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전 세계가 2030년 현재의 1.8배 규모로 성장할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며 "우리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현재 국회에 표류한 법이 하루라도 빨리 통과되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가 '왕좌' 자리를 계속해서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파운드리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이나 대만처럼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 등 정부의 지원책이 담긴 반도체 특별법 통과가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