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백도 이 시 앞에선 붓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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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黃鶴樓)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 최호(崔顥·704?~754) : 당나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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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엮은 『리더의 시, 리더의 격』이 3쇄에 들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표지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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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에 나오는 황학루는 어디에 있을까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의 창장(長江·양쯔강)에 있습니다.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의 강남 3대 명루로 꼽히는 누각이죠. 원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권이 서기 223년 유비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망루라고 합니다.
오래전 한 신선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학을 타고 구름 위로 날아가자 술집 주인이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촉(蜀)나라의 비위(費褘)가 신선이 돼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는 설도 있고요.
이 지역은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지점이었기에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교통도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됐고, 그때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이 돼야 하는 아픈 역사를 지녔지요. 황학루가 군사용 망루였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다 당, 송 시대를 지나며 시인 묵객들의 풍류를 위한 누각으로 변했죠.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주 훼손돼서 몇 번이나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1985년 중건된 지금의 누각 내부에는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습니다.
누각 4층에 오르면 이곳을 노래한 역대 명인들의 작품이 죽 걸려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가 바로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황학루’입니다.
이백이 이곳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시상에 젖어있다가 최호의 시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무슨 말로 황학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겠느냐’며 붓을 던졌다고 하지요. 이 일화가 퍼지면서 최호의 ‘황학루’는 당시(唐詩) 제1의 절창으로 추앙받게 됐습니다.
이백은 결국 이곳을 떠나 금릉에 가서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라는 시를 짓고서야 한을 풀었다고 해요. 자세히 보면 두 시가 제법 닮았습니다. 지세나 정감뿐만 아니라 장구(章句)와 운각(韻脚)까지 같으니 두 천재의 걸작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합니다.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다지만/ 봉은 가고 대도 비고 강만 흐르네. 오나라 궁전 미녀들도 길에 묻혔고/ 진나라 때 왕족들도 옛 무덤 됐네./ 삼산은 하늘 밖에 반쯤 걸려 있고/ 이수는 백로주를 갈라 흐른다./ 그 모두 뜬구름 해를 가리어/ 장안도 아니 뵈니 시름겨워라.’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떠났거니
이 땅에 황학루만 덧없이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고 오지 않는데
흰 구름은 느릿느릿 천년이어라.
한양 숲 또렷이 맑은 물에 어리고
앵무주 가득 메운 꽃다운 봄풀
날 저무니 고향은 어디메뇨
연파(煙波) 이는 강 언덕에 시름겨워라.
* 최호(崔顥·704?~754) : 당나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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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엮은 『리더의 시, 리더의 격』이 3쇄에 들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표지 누르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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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에 나오는 황학루는 어디에 있을까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의 창장(長江·양쯔강)에 있습니다. 악양루, 등왕각과 함께 중국의 강남 3대 명루로 꼽히는 누각이죠. 원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권이 서기 223년 유비와의 전쟁에 대비해 세운 망루라고 합니다.
오래전 한 신선이 술값 대신 벽에 누런 학을 그렸는데, 후에 그 학을 타고 구름 위로 날아가자 술집 주인이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촉(蜀)나라의 비위(費褘)가 신선이 돼 황학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는 설도 있고요.
이 지역은 창장(長江)과 한수이(漢水)가 만나는 지점이었기에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교통도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거듭됐고, 그때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이 돼야 하는 아픈 역사를 지녔지요. 황학루가 군사용 망루였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다 당, 송 시대를 지나며 시인 묵객들의 풍류를 위한 누각으로 변했죠. 격변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자주 훼손돼서 몇 번이나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1985년 중건된 지금의 누각 내부에는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습니다.
누각 4층에 오르면 이곳을 노래한 역대 명인들의 작품이 죽 걸려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가 바로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황학루’입니다.
이백이 이곳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시상에 젖어있다가 최호의 시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무슨 말로 황학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겠느냐’며 붓을 던졌다고 하지요. 이 일화가 퍼지면서 최호의 ‘황학루’는 당시(唐詩) 제1의 절창으로 추앙받게 됐습니다.
이백은 결국 이곳을 떠나 금릉에 가서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라는 시를 짓고서야 한을 풀었다고 해요. 자세히 보면 두 시가 제법 닮았습니다. 지세나 정감뿐만 아니라 장구(章句)와 운각(韻脚)까지 같으니 두 천재의 걸작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합니다.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다지만/ 봉은 가고 대도 비고 강만 흐르네. 오나라 궁전 미녀들도 길에 묻혔고/ 진나라 때 왕족들도 옛 무덤 됐네./ 삼산은 하늘 밖에 반쯤 걸려 있고/ 이수는 백로주를 갈라 흐른다./ 그 모두 뜬구름 해를 가리어/ 장안도 아니 뵈니 시름겨워라.’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