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삼화제지 대표가 지난 6일 서울 을지로 트윈타워에서 자사 특수지 제품을 들어보이며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김태호 삼화제지 대표가 지난 6일 서울 을지로 트윈타워에서 자사 특수지 제품을 들어보이며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삼화제지는 백화점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과 글로벌 럭셔리 패션브랜드의 패키지 박스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국내 대표 특수지 전문 제지업체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유명 럭셔리 브랜드는 상당수 이 회사의 특수지를 사용하고 있다. 마이크로미터(십만분의 1㎝) 단위의 작은 흠도 허용하지 않는 등 까다로운 품질 요건을 충족하는 아시아 대표 특수지업체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김태호 삼화제지 대표는 "구체적으로 어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어떤 제품에 우리 제품을 쓰는 지는 영업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면서도 "유럽에서 200~300년 역사를 가진 고급 특수지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아시아 대표 특수지업체라는 칭찬을 들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지난달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됐다.

국내 첫 특수지 출시하자... 고급 쇼핑백, 명품 포장재로 불티나게 팔려

삼화제지 역사는 김태호 대표의 부친인 고(故) 김기탁 명예회장이 1962년 서울 창동의 조그만한 제지공장을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김 명예회장은 삼성·LG그룹 창업주들과 함께 국내 최초로 해외 출장용 여권을 발급받아 세계를 누빈 '무역 1세대'로 통한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67~1979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1971~1985년)을 역임했으며 국내 최초로 전화기를 도입했고 용광로 내화벽돌로 쓰이는 마그네시아 클링커를 최초로 만들기도 했다.

초기 제지공장 실적은 형편 없었다. 대형 제지업계와 출혈 경쟁으로 적자만 누적됐기 때문이다. 김 명예회장은 틈새시장으로 눈을 돌려 아무나 만들지 못하는 고급 특수지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삼화제지는 1964년 종이 표면에 무늬를 입체적으로 새겨넣은 '레자크지'를 국내 최초로 출시하면서 국내 첫 특수지 생산기업이 됐다. 종이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입체감있게 무늬가 새겨지자 시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국내 판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삼화제지의 레자크지는 현재 백화점 명품 쇼핑백과 럭셔리브랜드의 패키지박스를 비롯해 선물용 건강기능식품 패키지, 화장품 패키지 등에 쓰인다. 1984년 화장품 및 의약품 패키지로 쓰이는 고광택 포장지 'CCP'를 선보였고 2005년 고급스런 질감의 특수 코팅 인쇄용지인 '러프그로스지(제품명:랑데뷰)'를 출시하며 특수지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 이 회사가 독보적인 국내 판매 1위를 기록중인 러프그로스지는 유명 한류 스타들의 화보집이나 자동차, 가전제품용 고급 카달로그를 만드는 데 활용된다.
삼화페이퍼 특수지로 만든 쇼핑백
삼화페이퍼 특수지로 만든 쇼핑백

수많은 문전박대에도 계속 두드린 수출길...아시아 대표 특수지로 낙점

내수 시장에 주력하던 이 회사가 세계적인 회사로 거듭나게 된 것은 2016년 김 대표가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김 대표는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며 유럽의 최고급 특수지들만이 뚫을 수 있는 명품브랜드 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기 2년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삼화제지 임직원들이 외국 본사까지 찾아가 문 앞에서 기다려도 만나주지도 않고 샘플을 보내면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김 대표는 포기하려는 직원들에게 "용기를 잃지말고 끈기있게 도전하자"며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면 감사하게 생각하자"며 계속 독려했다.

결국 2년 후 한 글로벌 업체가 공급망 다변화 차원에서 아시아 제조기지 확보위해 이 회사에 SOS를 쳤고, 이후 물꼬가 트이면서 다른 곳들도 잇따라 연결됐다. 김 대표는 "품질테스트 뿐만 아니라 제조시설, 환경영향, 인권경영 등에 대해 1년간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겨우 첫 거래가 성사됐다"며 "삼화제지는 고객맞춤형 제조와 빠른 납기, 서비스대응력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추구하는 제품 역시 '비스포크 페이퍼'다. 고객 맞춤형으로 명품 특수지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삼화페이퍼 특수지로 만든 쇼핑백
삼화페이퍼 특수지로 만든 쇼핑백
이 회사가 100년 기업이 즐비한 유럽 경쟁 제지업계를 뚫고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 잇따라 낙점되자 위상과 수익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 회사의 매출은 레자크지, 러프그로스지, CCP 등 특수지별로 골고루 분산돼 있고 반도체, 컴퓨터 등에 쓰이는 산업용 첨단 특수지 매출도 상당하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원자재 가격 급등 영향에도 불구하고 올해 매출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도 튼튼한 글로벌 고객군을 확보한 덕분이다. 김 대표는 "현재 20%인 수출 비중을 장기적으로 80%까지 끌어올릴 것"이라며 "2023년에도 불확실성이 큰 경영 환경이지만 앞만 보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