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많이 했던 놀이 중 ‘쌀보리’가 있다. “쌀”에 술래가 들어오는 주먹을 잡으면 공수가 바뀌는 간단한 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쌀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공권력을 활용해 ‘산미증산계획’ 같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식민지 국민을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차원이 아니라 일본 본토의 늘어나는 쌀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의 쌀 수탈지가 돼 우리가 생산한 쌀조차 우리가 먹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1912년도의 1인당 쌀 소비량이 60㎏대에서 1929년에는 약 36㎏으로 반 가까이 줄어드는 상황이 됐을까. 비워진 쌀의 자리는 만주에서 수입한 잡곡, 콩깻묵이 채웠다.

이런 염원은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통일벼의 등장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의 소비 성향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그간 억제됐던 쌀 소비 욕구가 가파르게 올라갔다. 통일벼가 사람들의 배는 채워줬는지 몰라도 혀까지 채우기에는 미질이 좋지 않았다. 부족했던 미질에 대한 바람은 품질 좋은 ‘일반미’가 채워줬다. 1980년대부터 쌀 수요가 지속해서 감소했다. 1982년 156.2㎏까지 증가했던 1인당 쌀 소비량은 지난해 56.9㎏으로 줄었다.

몇십 년 전에는 쌀 부족에 온 나라가 정책·사회·학문적으로 대처했는데 이젠 쌀 과잉으로 농업계가 힘들어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쌀을 먹기 위해 논과 저수지를 만들고 채집하며 살던 생활도 버리고 마을로 정착해 들어왔다.

쌀의 지위는 예전만큼 회복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5000여 년 동안 간직한 쌀에 대한 마음만은 모두가 알고 지켜줬으면 좋겠다.

오성진 농협중앙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