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할리우드 강타한 '네포 베이비' 논란
배우 조니 뎁 딸이 촉발시켜
'뉴욕매거진' 커버까지 장식
"대한항공 2세의 땅콩회항 기억하라"
FT는 창업자들의 2세 논란으로 다루기도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송중기 분)이 날린 대사입니다. 진도준은 대한민국 재계 1위 기업 순양을 창업한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의 막내 손주로 설정돼 있죠. 그는 "내가 장손도 아닌 너한테 순양을 물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는 할아버지 진 회장의 말에 이렇게 응수합니다.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선대의 자산을 물려받지 않겠다고요. 자신의 능력으로 직접 사버리겠다는 그의 대사에 시청자들은 전율을 느꼈을 겁니다. 연예인의 2세가 연예인이 되고, 기업인의 2세가 기업인이 되는 게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오늘날이니까요.
美서 부는 #네포 베이비 챌린지 열풍..."올해의 단어"
한국에 금수저가 있다면 미국에선 최근 '네포 베이비(Nepo baby)'란 단어가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혈연·지연 등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진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그 덕을 보는 족벌주의(Nepotism)에서 차용한 신조어인데요, 주로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인 등의 2세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경제신문의 글로벌 핫이슈, 오늘은 다소 가벼운 소재를 조금은 무겁게 다뤄보려고 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종합 격주간지 뉴욕매거진이 지난주 네포 베이비 논란을 커버스토리로 보도했습니다. "할리우드는 늘 유명 연예인과 그의 자녀들에게도 열광해왔지만, 올해는 단 두 단어 '네포 베이비'로 그들을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만연한 한해다"라고 말이죠. 틱톡에서는 할리우드 배우, 인플루언서 등의 자녀들을 발굴해 네포 베이비로 목록화하는 챌린지가 유행했습니다. 지난달엔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경영전문지 포브스에서도 관련 논란을 전했고요.세계적인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아들 브루클린 베컴이 대표적인 네포 베이비로 꼽힙니다. 포브스는 그를 "네포 베이비의 '최종 보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곤 "아버지를 따라 축구선수가 되려고 했다가 (잘 풀리지 않아서) 사진작가로 활동했지만, 아마추어적인 사진들로 인해 네티즌들의 밈(Meme) 소재로 쓰이는 등 비웃음을 사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배우 톰 크루즈의 딸 수리를 사랑했던 미국인들이 연예인 2세의 특권에 분노하기 시작한 건 몇몇 2세들의 철없는 발언 때문입니다. 특히 지난달 배우 조니 뎁의 딸 릴리 로즈 뎁이 논란에 불씨를 지폈습니다. 신장이 160cm인 그가 샤넬의 런웨이를 장식하는 하이패션 모델로 스타덤에 오른 것을 놓고 안그래도 뒷말이 많은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는 대중잡지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델이 될 만하니까 된 것"이라며 "나를 섭외하는 사람은 내 집안을 신경쓰지 않지만 유독 인터넷에서만 내게 편견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해당 인터뷰가 공개된 직후 샤넬의 뮤즈인 탑모델 비토리아 세레티가 즉각 일침을 가했습니다. "너한테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본 경험이 있긴 하느냐"고요.
FT "마크 주커버그 등 창업자의 차등의결권도 족벌주의"
파이낸셜타임스(FT)도 가세했습니다. 네포 베이비 논란을 기술기업 창업자들의 차등(복수)의결권 주식과 경영권 방어, 가업 상속에 빗대면서 말이죠. 차등의결권은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실제 보유한 지분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통상 창업 초기에 회사가 투자자들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입니다. 쿠팡이 차등의결권을 받기 위해 미국 상장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정부와 여당이 도입을 추진하고 있죠.차등의결권 주식을 보통주로 전환하는 일몰 조항이 없는 한 창업자의 권력은 영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기관투자자협의회(CII)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 증시에 입성한 기업들의 17%가 차등의결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일몰 조항이 없는 기업은 절반에 이른다고 하네요.
최근 메타버스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메타(옛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아무리 헛발질을 하고 주가를 떨어뜨려도 권좌를 지킬 수 있는 건 그가 보유한 차등의결권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차등의결권이 있는 상장사들의 실적이 저조해지는 데 단 7년이 걸린다고 보고 있습니다. 경영권 방어 수단을 믿고 회사를 방만하게 운영한 탓일까요?
유명 벤처 투자자 빌 걸리는 "차등의결권 제도는 창업자가 투자자들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꼬집습니다. 기업 가치평가의 대가로 통하는 애스워스 다모다란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교수는 "차등의결권 주식의 힘을 알면서도 (권한 없는) 보통주를 계속 사들여 기업 주가를 띄우는 투자자들의 이중성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하간 차등의결권이 있는 창업자는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기도 쉬워집니다. 이와 관련해 3년 전 뉴욕타임스(NYT)는 "당신은 마크 저커버그의 아이들의 아이들까지도 해임할 수 없을 것"이란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공유오피스 기업 위워크를 세웠던 애덤 뉴먼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나 봅니다. 직원들에게 "내 자식들이 회사를 통제하길 원한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각종 스캔들에 휘말려 결국 본인이 퇴출당하고 말았지만 말이죠.
FT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겁니다. "족벌주의가 능력주의를 압도하게 되면 2014년 대한항공 창업주 2세(조현아 당시 부회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고 꼬집네요. 유명인 2세 논란은 한국에서도 흔한 일입니다. 이제 연예인들의 육아 방송은 그들 자녀의 데뷔 방송이나 다름없게 됐구요.
한국 프로야구 간판타자 이정후는 이종범의 아들로서 겪었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 온갖 질투와 비아냥에 부담을 느꼈지만, 이정후는 결국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이종범의 아들'이란 꼬리표를 떼어 냈죠. 대중은 능력과 겸손함을 갖춘 네포 베이비라면 얼마든 그들의 성공에 박수를 칠 겁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