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의 ‘동심’. 갓을 쓴 노인이 회전목마를 타며 한껏 즐거워하고 있다.  /개인소장
신현국의 ‘동심’. 갓을 쓴 노인이 회전목마를 타며 한껏 즐거워하고 있다. /개인소장
“이제 고종 황제의 손자 이우(李·1912~1945)의 결혼사진을 꺼내 보겠습니다.”

지난 14일 찾은 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 삼청(뮤지엄한미)의 ‘냉장 수장고’. 관계자가 기계장치의 버튼을 조작하자 잠시 후 기계장치 아래쪽 문이 열리며 1935년 촬영된 흑백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87년 전 찍은 사진인데도 변색을 제외하면 마치 어제 찍은 것처럼 생생했다. 수장고 벽면에 걸린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1815~1879)의 1867년 작 ‘허버트 부인’ 등 100년도 더 된 사진예술 걸작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 시간이 지날수록 열화(劣化)돼 쉽게 상할 수 있는 매체임을 감안하면 보존 수준이 놀라웠다.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의 '허버트 부인'(1867).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의 '허버트 부인'(1867).
이 공간은 언제나 기온 5도, 습도 35%를 유지한다. 온·습도에 민감한 사진 작품의 장기 보존을 위한 특별 설계다. 김지현 뮤지엄한미 큐레이터는 “철저한 항온·항습 시설로 소장품의 생명을 500년씩 늘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진 전용 냉장 수장고는 세계에서 열 곳도 채 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뮤지엄한미뿐이다.

국내 최고 사진미술관, 삼청동에서 재탄생

뮤지엄한미 외부 전경. 뮤지엄 내부에는 사진을 500년 이상 장기 보존할 수 있는 완벽한 냉장 수장고가 구비돼 있다.  /뮤지엄한미 제공
뮤지엄한미 외부 전경. 뮤지엄 내부에는 사진을 500년 이상 장기 보존할 수 있는 완벽한 냉장 수장고가 구비돼 있다. /뮤지엄한미 제공
뮤지엄한미는 지난 21일 삼청동 문화거리 끝자락에서 개관한 사진 전문 미술관이다. 한미약품이 메세나 활동의 일환으로 2003년 문을 연 한미사진미술관이 모태다. 미술관 관계자는 “한미사진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새로 건물을 지었다”며 “서울 방이동 한미타워에 있는 한미사진미술관은 앞으로 사진 관련 도서관이 된다”고 설명했다.

지금 이곳에서는 개관전으로 ‘한국 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이 열리고 있다. 한국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사진가 42명의 작품 207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정해창의 1920~1930년대 ‘여인의 초상’, 임인식의 ‘6·25전쟁-군번 없는 학도병’(1950), 임응식의 ‘명동점경’(1976) 등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아우르는 ‘국가대표 사진’이 즐비하다.

명작들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건 2000㎡ 너비, 3층 구조의 미술관 건물이다. 설계자는 김수근(1931~1986)의 제자인 민현식 기오헌 건축사무소장(76). 밖에서 보기엔 베이지색의 수수한 직사각형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세 동으로 분리된 건물이 중정인 ‘물의 정원’을 둘러싸고 종횡으로 연결돼 있어 다소 화려한 인상을 준다. 건폐율과 용적률 등 건축 규제에 맞추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대표 사진 미술관’에 걸맞은 예술성을 지닌 건물이 됐다.
뮤지엄한미 큐레이터가 냉장 수장고 시설을 소개하고 있다.
뮤지엄한미 큐레이터가 냉장 수장고 시설을 소개하고 있다.
구조는 복잡하지만 관람객들의 동선은 단순하다. 물의 정원을 오른쪽에 두고 전시 안내에 따라 한쪽으로 계속 걸으면 된다. 최봉림 부관장은 “공간의 흐름에 따라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층마다 길게 가로로 난 창들은 삼청동의 다양한 얼굴을 여러 각도로 조망한다. 외부의 풍경을 공간 안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마침 기자가 찾은 14일은 삼청동에 ‘기습 폭설’이 내린 날. 창밖 설국으로 변한 삼청동 풍경이 사진 작품들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한미약품 ‘약재 보관 노하우’까지 도입

최민식의 '소녀의 식사'(1965).
최민식의 '소녀의 식사'(1965).
이 미술관의 핵심은 수장고다. 사진은 생각보다 상하기 쉬운 매체다. 빛을 쬐거나 온·습도가 높으면 금세 변색하고 형태가 희미해진다. 뮤지엄한미는 이처럼 연약한 소장품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특수 시설인 저온 수장고와 냉장 수장고를 만들었다.

폭염과 혹한에도 언제나 저온 수장고는 15도, 냉장 수장고는 5도를 유지한다. 온도가 5도 낮아지면 보존기간이 두 배씩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결정한 숫자다. 상대습도는 두 시설 모두 35%다. 미술관 측은 “수장고 외장재를 보존성이 높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드는 등 사진 보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고 자부했다.

수장고 너비는 317.4㎡로, 미술관 소장품이 2만여 점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넓지 않다. 건축 규제 때문에 공간을 넓게 확보할 수 없었다. 미술관은 발상을 전환해 수장시설을 7m 높이로 쌓아 올렸다. 높이 때문에 보존과 정리가 힘들다는 단점은 모기업인 한미약품의 첨단 약재 보관 기술을 적용해 극복했다. 기계장치를 통해 작품을 꺼내고 다시 넣는 장치에도 한미약품의 기술이 적용됐다. 김 큐레이터는 “참고할 만한 해외 시설이 몇 없어 수장고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온 수장고 벽 한쪽은 유리로 제작했다. 미술관 관계자는 “저온 보존과 공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일반 관람객이 감상할 수 있는 ‘보이는 수장고’ 형태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국내 최초 사진가인 황철 작가의 ‘원각사지 10층 석탑’ 원본(1880년대)을 볼 수 있다. 작품이 일반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고종의 초상 원본(1884년께), 흥선대원군의 초상 원본(1890년대)은 10년 만에 나왔다.

과거를 보존해 미래를 보는 공간

정해창이 1920~1930년대 찍은 여인의 초상.
정해창이 1920~1930년대 찍은 여인의 초상.
과거를 보존하려는 미술관의 노력이 수장고에 담겨 있다면, 반대로 지하 1층 멀티홀은 미래를 바라보는 공간이다. 미술관은 대형 미디어아트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 높이 7m에 이르는 전시 벽을 만들고 콘서트홀 급의 음향 설비를 갖췄다. 미디어아트와 대지미술, 설치미술, 개념미술 등 사진과 관련된 여러 현대미술 장르를 함께 품겠다는 게 미술관의 포부다. 그 옆에는 카페와 아트스토어가 마련돼 있다.

지상 2층에는 라운지와 레스토랑이 들어와 있다. 유리 천장 밑에 촘촘하게 설치된 빗살무늬 구조물이 햇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현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빛의 예술’인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미술관답다. 이번 전시는 내년 4월 16일까지 열리며 휴관일은 월요일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