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반짝이는 영혼을 그린 '핀란드의 뭉크'[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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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을 그리는 건 고된 작업이다.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한 화가가 이젤 위에 거울을 걸어두고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죠.
자신의 얼굴을 화폭에 담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한 비참한 순간의 얼굴을 그릴 때, 나이 들어 잔뜩 주름진 모습을 그릴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누구보다 잘 아는 대상이지만, 또 그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게 자신 스스로가 아닐까요. 안티 조키넨 감독의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2021)은 독특한 색감과 기법으로 많은 자화상을 남겼던 화가 헬렌 쉐르벡(1862~1946)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쉐르벡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힙니다. 다소 음울하고 어두우면서도 개성 넘치는 그림을 그려 '핀란드의 뭉크'라고 불리죠. 2020년 헬싱키의 아테네움 미술관에서 개최된 쉐르벡 전시회는 1887년 미술관 개장 이래 가장 많은 일일 방문객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쉐르벡의 자화상은 나이대별로도 그 특색이 다른데요. 영화는 그중에서도 50대 쉐르벡의 삶과 사랑을 비추며, 당시 그가 그린 자화상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쉐르벡 역은 배우 로라 비른이 연기했습니다.
쉐르벡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4살 때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미술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23살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그의 당차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담겨 있죠. 그러나 그는 평생 건강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한 영국 화가와 약혼을 했지만, 다리를 절뚝인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족 측이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쉐르벡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갔습니다. 미술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건강 문제로 그만둬야 했죠.
결국 쉐르벡은 어머니와 히방카 지역에서 요양을 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어, 딸을 심하게 차별했습니다. 그의 오빠는 여동생이 그림을 그려 번 돈들을 챙겨 가져갔죠. 그는 집안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쉐르벡은 홀로 열심히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0대가 되어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51살이 되던 해엔 미술상 괴스타 스텐만이 쉐르벡을 찾아왔습니다. 스텐만은 그의 그림을 높게 평가하며 전시를 주선했죠. 영화도 스텐만이 찾아온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쉐르벡은 55살이 되어 처음 개인전을 열게 되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기 시작한 쉐르벡에게 새로운 사랑도 찾아옵니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산림 관리사인 에이나르 레우테르입니다. 쉐르벡은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주고 열심히 그림을 배우려는 레우테르에게 빠져들죠. 레우테르에게 자신의 돈을 쥐여주며, 여행을 떠나 홀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쉐르벡의 진심은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레우테르는 여행에서 돌아와 젊은 여성과 약혼을 하죠. 영화는 쉐르벡이 레우테르를 보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그의 변심으로 충격을 받고 절망하는 모습까지 담아냅니다. 그러나 쉐르벡은 사랑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더욱 성숙해 집니다. 50대에 그린 쉐르벡의 초상화는 다소 초췌하긴 하지만, 반짝이는 영혼을 담고 있습니다. 레우테르와는 훗날 사랑보다 더 빛나는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평생 1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했죠. 쉐르벡은 나이 든 자신의 모습도 솔직하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82세에 그린 자화상에선 한쪽 눈동자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마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처절하게 늙고 병든 모습을 표현한 것이죠. 그렇게 쉐르벡은 죽기 직전까지 1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자화상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표현하는 일. 그건 영화 속 대사처럼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을 통째로 담아내듯 어렵고도 값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끈질기게 응시한 쉐르벡처럼,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어루만져 주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한 화가가 이젤 위에 거울을 걸어두고 끊임없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죠.
자신의 얼굴을 화폭에 담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한 비참한 순간의 얼굴을 그릴 때, 나이 들어 잔뜩 주름진 모습을 그릴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누구보다 잘 아는 대상이지만, 또 그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게 자신 스스로가 아닐까요. 안티 조키넨 감독의 영화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2021)은 독특한 색감과 기법으로 많은 자화상을 남겼던 화가 헬렌 쉐르벡(1862~1946)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쉐르벡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힙니다. 다소 음울하고 어두우면서도 개성 넘치는 그림을 그려 '핀란드의 뭉크'라고 불리죠. 2020년 헬싱키의 아테네움 미술관에서 개최된 쉐르벡 전시회는 1887년 미술관 개장 이래 가장 많은 일일 방문객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쉐르벡의 자화상은 나이대별로도 그 특색이 다른데요. 영화는 그중에서도 50대 쉐르벡의 삶과 사랑을 비추며, 당시 그가 그린 자화상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쉐르벡 역은 배우 로라 비른이 연기했습니다.
쉐르벡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4살 때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평생 다리를 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미술 아카데미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23살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그의 당차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담겨 있죠. 그러나 그는 평생 건강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한 영국 화가와 약혼을 했지만, 다리를 절뚝인다는 이유로 남자의 가족 측이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쉐르벡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갔습니다. 미술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건강 문제로 그만둬야 했죠.
결국 쉐르벡은 어머니와 히방카 지역에서 요양을 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니는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어, 딸을 심하게 차별했습니다. 그의 오빠는 여동생이 그림을 그려 번 돈들을 챙겨 가져갔죠. 그는 집안에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쉐르벡은 홀로 열심히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0대가 되어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51살이 되던 해엔 미술상 괴스타 스텐만이 쉐르벡을 찾아왔습니다. 스텐만은 그의 그림을 높게 평가하며 전시를 주선했죠. 영화도 스텐만이 찾아온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쉐르벡은 55살이 되어 처음 개인전을 열게 되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기 시작한 쉐르벡에게 새로운 사랑도 찾아옵니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산림 관리사인 에이나르 레우테르입니다. 쉐르벡은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주고 열심히 그림을 배우려는 레우테르에게 빠져들죠. 레우테르에게 자신의 돈을 쥐여주며, 여행을 떠나 홀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쉐르벡의 진심은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 레우테르는 여행에서 돌아와 젊은 여성과 약혼을 하죠. 영화는 쉐르벡이 레우테르를 보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 그의 변심으로 충격을 받고 절망하는 모습까지 담아냅니다. 그러나 쉐르벡은 사랑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더욱 성숙해 집니다. 50대에 그린 쉐르벡의 초상화는 다소 초췌하긴 하지만, 반짝이는 영혼을 담고 있습니다. 레우테르와는 훗날 사랑보다 더 빛나는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평생 1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했죠. 쉐르벡은 나이 든 자신의 모습도 솔직하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82세에 그린 자화상에선 한쪽 눈동자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마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처절하게 늙고 병든 모습을 표현한 것이죠. 그렇게 쉐르벡은 죽기 직전까지 1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자화상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표현하는 일. 그건 영화 속 대사처럼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을 통째로 담아내듯 어렵고도 값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끈질기게 응시한 쉐르벡처럼,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어루만져 주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