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지난 가을 남해 아난티CC 4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아난티CC 제공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지난 가을 남해 아난티CC 4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아난티CC 제공
경남에 있는 남해 아난티CC의 시그니처홀(아웃코스 4번홀·파3)은 본래 갯벌이었다. 흙을 쌓고 지반을 다져 ‘물 반, 모래 반’이었던 펄을 땅으로 변신시켰다. 그래서 물이 들어오는 오전에는 티잉 에이리어와 그린 사이를 푸른 바다가 채운다. 수많은 골퍼의 로망인 ‘바다를 건너는 샷’을 하는 홀이 된다.

물이 빠지면 바다가 채웠던 자리의 주인은 펄이 된다. 실망할 법도 한데, 상당수 골퍼는 이 풍경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이유가 재미있다. ‘남해 같아서’란다. 남해는 모래 및 바위로 이뤄진 동해와 달리 사방천지가 펄이다. 2018년 골프장 이름을 남해 힐튼CC에서 남해 아난티CC로 바꾸면서 힐튼에 맡겼던 운영도 직접 맡은 아난티가 가장 신경 쓴 게 바로 ‘남해다움’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걸 느끼려고 오전에 라운드하면서 만난 4번홀을 오후에 다시 찾았다. 눈 앞에 펼쳐진 넓은 펄은 ‘당신은 지금 남해에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토종 링크스 코스의 원조

아난티 4번홀의 또 다른 이름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홀’이다. 바다를 건너는 홀, 펄을 건너는 홀이어서가 아니다. 휴장일에 그린과 티잉 에이리어 사이는 바구니를 이고 온 동네 주민들 차지가 된다. 세상 어디에 이런 홀이 있겠는가. 주민들은 바구니를 동죽 같은 큰 조개로 가득 채우고서야 펄을 비워준다. 배경락 남해 아난티CC 경기팀장은 “태풍이 거셀 땐 이곳을 어선들의 피항지로 개방한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코스는 편안하게 설계됐다. 아웃코스와 인코스 9홀씩 총 18홀인 남해 아난티CC의 총연장은 7200야드에 달한다. 땅을 넉넉하게 간척한 덕분에 페어웨이는 넓은 편이다. 명문 골프장의 조건 중 하나인 ‘넓고 긴’ 페어웨이를 갖췄다. 그래서 웬만하면 드라이버가 엇나가지 않는다. 페어웨이가 평평한 덕분에 거의 모든 샷은 ‘평지 샷’이다. 페어웨이와 똑같은 장성 중지를 심은 러프 길이도 짧다. 러프 길이가 웬만한 수도권 골프장의 페어웨이 길이다.

티샷이 죽을 일 없고, 러프도 무섭지 않다고 남해 아난타CC를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친다. 수도권 골프장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바닷바람이란 ‘복병’ 때문이다. 함께한 캐디는 “4번홀은 사실상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에 공을 올리는 구조”라며 “맞바람이 거센 날엔 평소 거리보다 2~3개 클럽 길게 잡아야 한다”고 했다.

기자가 찾은 날이 그런 날이었다. 실제 거리는 158m(화이트티 기준)였지만, 캐디는 두 클럽 이상 긴 채를 권했다. 175m를 보낼 수 있는 4번 아이언과 180m는 너끈히 보내는 18도 하이브리드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긴 채를 꺼냈다. 잘 맞았다 싶었는데, 간신히 바다를 건너 그린 앞 에이프런에 떨어졌다.

생각한 것보다 맞바람이 셌나 보다. 4번 아이언을 휘둘렀다면 자칫 바다에 빠질 뻔했다. 56도 웨지로 홀 컵에 붙여 파 세이브. 티샷하기 전 그림 같은 풍광과 시원한 바닷바람에 푹 빠져 ‘공이 어디로 가든 어떠랴. 바다 아니면 그린일 테지’라며 마음을 내려놓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2006년 개장한 남해 아난티CC는 한국형 링크스(links) 코스의 원조라고 불리는 골프장이다. 링크스는 ‘자연과 맞선다’는 옛 골프 철학을 구현한 코스다. 골프를 발명한 스코틀랜드인은 해안가 모래 언덕에서 비바람과 함께할 때 골프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대회인 ‘디오픈’이 열리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대표적인 링크스 코스다.

스코틀랜드 골프장처럼 길고 질긴 러프는 없지만, 해안에 접한 땅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살렸다는 점에서 남해 아난티CC도 ‘링크스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링크스 코스인 탓에 해풍이 없는 날과 있는 날의 스코어는 확 벌어진다. 싱글 골퍼가 순식간에 백돌이가 되는 곳이 남해 아난티CC다. 그래서 골퍼들은 말한다. ‘남해 아난티CC에선 핸디캡이 의미 없다’고.

겨울 골프의 성지

대중제 골프장인 남해 아난티CC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는 그린이다. 주중 기준 그린피가 16만원 정도로 그리 비싸지 않은데도 18홀 평균 그린 스피드가 3.0m(스팀프 미터 기준)에 달한다. 박효성 아난티CC 관리팀장은 “2.6m 정도로 관리하는 한여름만 빼면 거의 1년 내내 3.0m 이상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봄·가을 성수기에 매일 80팀가량 받고, 겨울에도 운영하는 대중제 골프장 중 그린 스피드가 이렇게 빠른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페어웨이 잔디의 밀도도 수도권의 웬만한 회원제 골프장 못지않다는 평을 받는다. 박 팀장은 “잔디 길이를 1.8㎝로 유지하기 위해 매주 두세 번 깎는다”며 “골퍼들이 촘촘한 잔디 위에 살짝 떠 있는 공을 칠 수 있도록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남해 아난티CC를 못 가봤거나 그저 그랬던 옛 추억을 갖고 있는 골퍼라면 지금이 기회다. 대다수 수도권 골프장이 ‘겨울잠’에 들어갔지만, 이곳은 폭설이 내려 쌓이지 않는 한 한겨울에도 문을 연다.

외딴곳에 있는 만큼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고객이 많다. 엄숙한 분위기의 고급 골프장이라기보다는 편안하게 쉬는 휴양형 골프장이다. 그래서 초보 골퍼가 많고, 여성 골퍼 비중도 높은 편이다. 남해 아난티CC의 겨울 골프는 이제 시작이다.

남해=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