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죽자 벌인 '미친 짓'…유럽 뒤흔든 '막장 드라마'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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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광적인 사랑'
합스부르크 왕가 '맏며느리' 후아나
합스부르크 왕가 '맏며느리' 후아나
![남편 죽자 벌인 '미친 짓'…유럽 뒤흔든 '막장 드라마'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471.1.jpg)
![옆에 앉은 여성들의 얼굴 세부 확대.](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479.1.jpg)
![얼굴 세부 확대.](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475.1.jpg)
아마도 후아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펠리페는 죽지 않았어. 잠든 것뿐이야. 혹시 죽었더라도 다시 살아날 거야. 관을 열면 그이가 많이 놀랐냐며, 다 장난이었다며 빙긋 웃을지도 몰라. 지금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하지만 동행하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었겠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후아나 여왕의 ‘미친 사랑’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후아나 공주, 백마 탄 왕자를 만나다
![1400년대 이베리아 반도의 모습. 중앙 노란색 땅이 후아나의 어머니가 계승한 카스티야 연합왕국, 오른쪽 보라색 땅이 후아나의 아버지가 계승한 아라곤 연합왕국이다. 아래쪽 작은 붉은색 땅은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는 그라나다 지역이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484.1.jpg)
후아나의 부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의 왕이었고, 어머니(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의 여왕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이 둘의 ‘세기의 결혼’(1469)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1492년 이베리아반도 남부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781년에 걸친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을 마무리했습니다. 나라를 통일시키고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서 현재 스페인의 틀을 만든 주인공이 바로 이 부부인 거죠.
![후아나의 아버지(페르난도 2세)와 어머니(이사벨 1세) 부부의 초상화. 당시 유럽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에 따라 남편을 아내보다 크게 그리곤 했는데, 둘의 기싸움으로 인해 부부를 그리거나 조각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완벽히 같은 크기로 묘사돼야 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494.1.jpg)
![빈미술사박물관이 소장중인 후아나 1세의 초상화.](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01.1.jpg)
![펠리페 1세의 초상화. 그림만 보면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그는 당시 '미남의 상징'으로 불렸다고 한다. '매력 포인트'는 밝은 금발과 회청색 눈, 귀족적인 외모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잘 생겼지만,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양식 때문에 이렇게 묘사됐을 가능성도 있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25.1.jpg)
1496년 결혼식을 위해 펠리페의 영지에 발을 내디딘 후아나.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재촉하는 그녀 앞에 웬 미남이 나타납니다. 예고도 없이 마중 나온 18세의 예비 신랑이었습니다. 피 끓는 나이, 둘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첫날밤을 치러 양가 부모님들을 황당하게 만듭니다. “에휴…. 뭐 금슬은 좋겠구만.” 어쨌거나 결혼식은 예정대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질투, 집착, 실성
![후아나와 남편 부부의 초상화.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19.1.jpg)
장녀에 이어 후계자인 아들까지 나오자 펠리페는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돕니다. ‘너한테 질렸다’는 티도 팍팍 냈죠. 후아나의 집착은 더 깊어졌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남편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그럴수록 펠리페는 지긋지긋하다고 여겼습니다.
후아나의 히스테리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아내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펠리페가 임신 중인 후아나를 스페인에 놔두고 영지로 돌아간 적도 있었는데, 출산하자마자 쫓아간 후아나가 궁정에서 펠리페의 애인을 발견하고 가위로 머리를 다 잘라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펠리페는 후아나의 뺨을 때렸죠. 남편과 배를 탈 때는 “나 말고 여자가 한 명이라도 탄 배는 절대 안 된다”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아침 TV에 틀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막장입니다. 스페인 궁정에는 “후아나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집니다.
![루벤스가 그린 펠리페의 사후 초상화. 펠리페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로 자주 오인되는 그림이다. 위의 초상화들보다는 훨씬 인물이 낫긴 하다. 빈미술사박물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26.1.jpg)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히 후아나가 다음 여왕이 돼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죠. “아내에게 기죽어 살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내가 스페인의 왕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후아나의 계승권을 빼앗아 오기 위해 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죽자마자 50대의 나이에 어린 후처를 얻은 것도 왕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을 새로 낳아서 통일 왕국을 물려주려 했던 거죠. 후아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요.
펠리페의 행동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긋지긋한 아내와 참고 살았던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며 헐레벌떡 영지에서 스페인으로 간 거죠. 아버지와 남편은 후아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할 사람들인데, 정작 이들은 후아나를 ‘왕관을 얻을 도구’로만 여겼던 겁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와 남편은 스페인의 주도권을 놓고 거하게 한 판 붙을 상황에 놓였습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가족 전체가 비호감 덩어리였죠. 후아나는 미쳤고, 아버지도 권력에 미쳐 딸을 버린 비정한 사람, 펠리페는 두말할 것 없는 인간쓰레기라는 게 당시 인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카스티야 왕위를 물려받아야 합니다. 여러 현실적인 역학관계를 따져봤을 때 아라곤을 갖고 있는 아버지에게 권력을 몰아주기보다는 펠리페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것이 낫다는 게 당시 지배층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장인과 사위의 어색한 공동 통치가 시작됩니다.
![찰스 드 스투번의 '미친 후아나'(1836). 프랑스 릴 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42.1.jpg)
다시 실권을 잡은 후아나의 아버지. 미쳤다는 이유로 29세의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과 함께 궁전에 유폐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스페인을 홀로 통치해 나갑니다. 이 유폐는 후아나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비극적인, 그래서 예술적인
![프란시스코 프라디야의 '딸과 감금된 광녀 후아나'(1906). 왼쪽이 후아나와 그의 막내딸이다. 프라도미술관 소장](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54.1.jpg)
하지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후아나의 이런 이미지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후아나의 왕관을 노렸던 남편과 아버지가 한마음 한뜻으로 “후아나는 미쳤으니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정치적 선전이 상식처럼 굳어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후아나의 삶은 더더욱 불쌍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 돈과 권력을 빼앗는 데 혈안이 돼서, 내가 미쳤다는 소문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다니며 피 터지게 싸우는 꼴이라니….
한편으로는 후아나가 일부러 ‘미친 척’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펠리페가 죽었을 때 후아나의 나이는 20대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홀몸의 강대국 여왕이니, 결혼하려는 다른 나라 왕족들이 줄을 설 수밖에 없죠. 새로 결혼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나오면 또 집안에는 피를 튀기는 권력 투쟁이 벌어질 겁니다. 펠리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권리를 지키려면 결혼할 마음을 접게 만들어야겠죠. 펠리페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미친 척을 했다는 겁니다.
![후아나와 펠리페의 아들인 카를 5세가 통치할 때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영토.](https://img.hankyung.com/photo/202212/01.32204570.1.jpg)
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네요. 오늘 소개한 이야기는 역사가 전하는 일종의 ‘오답 노트’입니다. 후아나의 가족들처럼 살면 당연히 안 되겠고, 사랑을 하더라도 후아나처럼 하면 곤란하겠죠.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는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