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과 CJ제일제당의 '협상시즌'
판매수수료율 두고 이견 못좁혀
양쪽 CEO "절대 밀려선 안된다"
제조·판매사가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이른바 ‘제판(제조·판매)전쟁’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플랫폼 업체는 물론 오프라인 유통사까지 참전해 필수소비재 기업들과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대치 이어가는 쿠팡·CJ
27일 유통·식품업계에 따르면 쿠팡과 ‘식품업계 대장’ CJ제일제당이 내년에 적용할 납품단가를 놓고 진행 중인 협상은 공전을 거듭해 해를 넘길 공산이 커졌다.이들의 신경전은 쿠팡이 지난달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 햇반 등 발주를 중단하면서 표면화했다. 당시 쿠팡은 “CJ제일제당이 납품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CJ제일제당은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쿠팡이 일방적으로 발주를 끊었다”고 받아쳤다.
쿠팡에서 직매입한 CJ제일제당 제품은 현재 재고가 소진돼 ‘로켓배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픈마켓에 입점한 업체가 CJ제일제당 제품을 판매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CJ제일제당은 다른 플랫폼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방식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물밑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게 양사 공식 입장이지만 속내는 간단치 않다. 두 곳 모두 최고경영자(CEO)가 실무진에 “절대 밀려선 안 된다”는 지침을 전달했을 정도다.
CJ제일제당 외 상당수 다른 식품업체도 난항을 겪고 있다. 수백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소 식품사 중 일부는 내년 쿠팡 입점을 포기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한 식품사 CEO는 “과거 대형마트도 상대하기 버거웠지만 지금의 e커머스는 ‘끝판왕’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휩쓰는 제판전쟁
해외에선 최근 수년간 아마존, 스탁엑스(리셀 플랫폼) 등 ‘플랫폼 진영’과 나이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같은 ‘패션·명품 진영’ 간 혈전이 뜨거웠다. e커머스 부상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직감하고, 대응에 나선 제조사 중 대표적인 곳은 나이키다.나이키는 이미 2019년 11월 아마존에 공급 거부를 선언한 뒤 자사몰을 통한 직접판매(D2C)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올초엔 ‘짝퉁’을 판매한 e커머스 입점사들을 고소하면서 “아마존과 이베이가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맹비난했다.
오프라인 유통사들엔 ‘절대 갑(甲)’으로 군림하는 럭셔리 기업도 e커머스 공룡들 앞에선 극도의 경계심을 보인다. 아마존이 지난달 명품 리셀 플랫폼 WGACA와 파트너십을 맺고 중고 명품 판매에 나선 것과 관련해 “범죄 세력의 지원을 받은 위조품이 거래될 수도 있다”(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는 노골적 견제가 나올 정도다.
오프라인 유통기업들은 자체브랜드(PB) 상품을 무기 삼아 제조사를 위협하고 있다. 독일 초저가 슈퍼마켓 알디가 PB를 앞세워 유럽 시장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킨 게 그런 사례다.
알디는 지난달 모리슨을 제치고 영국 유통업계 점유율 4위에 올라섰다. 영국에서 유통 4강 구도가 깨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e커머스가 뒤흔든 유통판
전문가들은 제판전쟁이 세계적으로 더욱 격화할 것을 기정사실로 본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이들이 최악의 경기침체에 직면했다는 점이다.올해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촉발한 자본시장 냉각과 경기둔화로 e커머스는 ‘독자 생존’, 제조사는 ‘수익성 개선’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납품 주도권까지 빼앗기면 내년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게 두 진영의 근심거리다.
비대면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e커머스의 영향력이 역대 어떤 유통 채널보다 강력해진 건 보다 근본적 요인이다.
박종관/하수정/박동휘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