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희의 미래인재 교육] 공격형 인재, 수비형 인재
2023 수능 만점자 세 명 모두가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 언제부터인가 이과 수재들의 의대행은 마치 공식처럼 여겨졌다. 1970~1980년대 이과 수석은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같은 이공계를 선택했다. 과거에는 의대보다 서울대를 선호했고, 서울대에서도 최상위 학과는 이공계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도권에서 지방까지 모든 의대를 성적순으로 채운 뒤에야 서울공대 지원이 시작된다. 수능 고득점자가 의대를 지원하지 않을 경우 ‘나만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회심리 때문에 의대 전염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의대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다. 엄청난 경제 위기가 미래 세대의 직업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다. 자연계 상위 20개 학과 배치표를 보면, 상위 20개 학과에서 의치한약학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1990학년도 20%, 2000학년도 65%, 2022학년도 100%임을 알 수 있다. 이공계 입학생의 의대 진학을 위한 자퇴율도 계속 증가해 의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가 서울공대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니, 실제 현실은 더 심각하다. 수재들의 의대 쏠림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핵심 인재 수급은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나라 이공계 졸업생은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에 비해 사회적 지위, 보상체계, 안정성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 차원에서 시장 논리에 근거한다면 의대 진학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이처럼 개인적 안정을 추구하는 인재들은 ‘수비형 인재’를 고수하게 된다. 미국 구글, 아마존, 애플, 테슬라 모두 세상의 판이 바뀔 때 공격적으로 판을 주도해 새로운 시장을 장악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새로운 판의 시작이다. 최고의 수재들이 래리 페이지, 제프 베이조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같은 ‘공격형 인재’가 돼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의대 전염 현상’과 ‘이공계 기피 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파격적인 예산 지원과 정책 배려만으로 승부를 걸었으나, 결과적으로 수재들의 의대 전염 현상은 더욱 심화했다. 사회·심리적 요인을 간과한 것이다. 최근 미국 정부에서는 반도체와 첨단기술 생태계 육성에 총 2800억달러를 투자하는 ‘반도체 과학법’을 발효했다. 이 법안은 유·초등부터 대학, 대학원, 직업 단계까지를 총망라하는 광범위한 법안으로 인력 양성뿐만 아니라 연구개발, 인프라 확충 등 첨단기술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법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STEM(science·technology·engineering·math) 분야 전공자에 대한 양질의 멘토링 활성화, 정서적 안정 지원, 최고책임자 직위의 체계화 및 리더십 강화 등 사회·정서적 측면의 전략이 포함된 것이다.

로버트 프랭크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개인행동이 변화된다는 행동 전염(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경향성) 이론을 제시한다. 공공정책을 추진할 때도 사회적 인식 조성을 위한 전략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고, 이것이 개인행동을 가장 빠르게 변화시킨다. 지난 정부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 원인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회·심리적 측면을 간과해 많은 예산은 들어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개개인의 가치 선택은 정부 예산 규모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공격형 인재를 존중하는 ‘사회적 인식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 아쉽게도 윤석열 정부의 첨단인력 양성정책에도 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