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자유를 가르쳐야 할 이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친시장 개혁·법과 원칙·가치동맹
자유의 가치가 넘친 2022년
풍요로운 자유 사회 유지하려면
체계적인 교육 필요
시민과 기업의 지원 절실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자유의 가치가 넘친 2022년
풍요로운 자유 사회 유지하려면
체계적인 교육 필요
시민과 기업의 지원 절실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후세의 경제사학자들은 2022년을 어떻게 평가할까.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체성 회복을 선언한 해로 기록할 것이 틀림없다. “자유는 보편적 가치”라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일성(一聲)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의 입에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그런 선언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끊임없이 흔들어 댄 좌익 세력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다. 그런 선언이 있던 후, 빼앗겼던 ‘자유’가 역사 교과서로 되돌아온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대통령실 홈페이지에는 민간 주도의 경제, 자율·창의의 존중, 국민 상식의 존중 등 자유의 증진을 의미하는 가치가 차고 넘친다.
번영과 풍요를 안겨주는 게 자유라는 이유에서 친(親)시장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 법 집행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 자유민주를 함께하는 나라들과 가치동맹을 중시하는 것 등은 이전 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기만 하면, 자유주의 정체성 회복을 선언하거나 자유가 역사 교과서에 돌아오기만 하면, 저절로 한국 사회에 자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자유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촉구했지만 유감스럽게도 120개 국정과제에 그런 재발견에 필요한 정책이 전혀 없다.
지식인·학생·시민은 물론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자까지도 자유의 가치에 대해 문외한이 대부분이다. 시장과 경쟁은 약자를 강자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체제라고 믿는 사람도 대단히 많다. 자유경제에 대한 미신은 저절로 불식되는 것,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유 사회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체계적인 가르침을 요구하는 게 자유주의다. 별도의 교육 없이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증오하고 시장과 경쟁을 두려워하는 공산·사회주의 등이다.
반(反)자유주의 정서의 원천을 알면 자유 사회의 확립과 유지를 위해 자유에 관한 별도의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선 주목할 건 강제적으로 실현하는 배려 나눔 연대감 등 사회주의적 도덕의 원천이다.
이는 수만 년 전 인류의 본능·심리 구조가 형성되던 사회적 환경이다. 약 150명의 사람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사회 규모는 작았고, 구성원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에 국한됐다. 수령의 명령에 따라 수렵·채집을 하면서 살았다. 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갖는 척박한 ‘제로섬 사회’였다. 생각과 행동이 비슷했기에 개인의 고유성이 없었고 평등이 지배했다. 그런 본능적 태도를 강제로 익명의 거대 사회에 확대·적용한 게 경제민주화, 나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 등이다.
그러나 척박하고 야만적인 제로섬 사회를 극복하고 낯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분업을 통해 풍요로운 자유 사회를 가능하게 한 건 인격·소유 존중, 자기 책임 등 기본원칙의 자생적 등장이었다. 그런 원칙은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말하기 쓰기 또는 셈하기처럼 끊임없는 교육과 학습의 결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풍요로운 자유 사회를 확립하고 유지하려면 교육을 통해 미성숙하고 야만적인 인간을 개화해야 한다.
원시적 가치들은 우리와 같은 현대인의 본능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본능은 대대손손 전달할 수 있지만 지울 수는 없다. 자유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이 없으면 언제나 본능적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려는 충동을 받는 건 그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자유에 관한 가르침이 없이 반공과 경제성장에만 몰입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포퓰리즘·주사파·반미·반일 등 자유의 온갖 적(敵)에게 떠밀려 자유가 위협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는 자유를 확립·유지할 수 없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인식할 수 있게 하는 체계적인 교육이다. 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자유라는 두 글자다. 그런 교육을 좌우하는 건 뜻있는 시민과 기업의 지원 여부다!
번영과 풍요를 안겨주는 게 자유라는 이유에서 친(親)시장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 법 집행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 자유민주를 함께하는 나라들과 가치동맹을 중시하는 것 등은 이전 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기만 하면, 자유주의 정체성 회복을 선언하거나 자유가 역사 교과서에 돌아오기만 하면, 저절로 한국 사회에 자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자유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촉구했지만 유감스럽게도 120개 국정과제에 그런 재발견에 필요한 정책이 전혀 없다.
지식인·학생·시민은 물론 중·고등학교 교사와 학자까지도 자유의 가치에 대해 문외한이 대부분이다. 시장과 경쟁은 약자를 강자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체제라고 믿는 사람도 대단히 많다. 자유경제에 대한 미신은 저절로 불식되는 것,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유 사회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체계적인 가르침을 요구하는 게 자유주의다. 별도의 교육 없이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오히려 자유를 증오하고 시장과 경쟁을 두려워하는 공산·사회주의 등이다.
반(反)자유주의 정서의 원천을 알면 자유 사회의 확립과 유지를 위해 자유에 관한 별도의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선 주목할 건 강제적으로 실현하는 배려 나눔 연대감 등 사회주의적 도덕의 원천이다.
이는 수만 년 전 인류의 본능·심리 구조가 형성되던 사회적 환경이다. 약 150명의 사람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사회 규모는 작았고, 구성원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에 국한됐다. 수령의 명령에 따라 수렵·채집을 하면서 살았다. 한 사람이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이 적게 갖는 척박한 ‘제로섬 사회’였다. 생각과 행동이 비슷했기에 개인의 고유성이 없었고 평등이 지배했다. 그런 본능적 태도를 강제로 익명의 거대 사회에 확대·적용한 게 경제민주화, 나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 등이다.
그러나 척박하고 야만적인 제로섬 사회를 극복하고 낯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분업을 통해 풍요로운 자유 사회를 가능하게 한 건 인격·소유 존중, 자기 책임 등 기본원칙의 자생적 등장이었다. 그런 원칙은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말하기 쓰기 또는 셈하기처럼 끊임없는 교육과 학습의 결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풍요로운 자유 사회를 확립하고 유지하려면 교육을 통해 미성숙하고 야만적인 인간을 개화해야 한다.
원시적 가치들은 우리와 같은 현대인의 본능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본능은 대대손손 전달할 수 있지만 지울 수는 없다. 자유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이 없으면 언제나 본능적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려는 충동을 받는 건 그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자유에 관한 가르침이 없이 반공과 경제성장에만 몰입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포퓰리즘·주사파·반미·반일 등 자유의 온갖 적(敵)에게 떠밀려 자유가 위협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 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제압하지 않고는 자유를 확립·유지할 수 없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인식할 수 있게 하는 체계적인 교육이다. 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자유라는 두 글자다. 그런 교육을 좌우하는 건 뜻있는 시민과 기업의 지원 여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