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지난 가을 전북 고창CC 바다코스 3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고창CC 제공
조수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지난 가을 전북 고창CC 바다코스 3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고창CC 제공
전북 고창의 황토는 풍요롭다. 붉은빛을 띤 이 흙은 품에 안은 모든 생명을 힘 좋게 키워낸다. 고창의 수박과 멜론, 고구마가 달고 실한 이유다. 고창의 황토는 생명이 살기 힘든 염전도 새파란 골프장으로 변신시켰다. 염전으로 쓰던 땅 위에 1.5m 높이로 고창 황토를 덮었더니, 잔디는 빽빽하게 자랐고 소나무는 숲을 이뤘다.

2006년 문을 연 21홀 규모의 퍼블릭 골프장인 고창CC는 그래서 남다르다. 염전을 갈아엎은 덕분에 평평하다. 탁 트인 페어웨이는 이리 휘고, 저리 휜 한국 골프장이 아닌 넓고 긴 미국 골프장을 닮았다. 그렇다고 매립지에 들어선 어떤 골프장처럼 황량한 것도 아니다. 고창의 황토가 기른 소나무 숲 덕분이다. 주변 풍광도 특이하다. 코스 바로 옆에는 지금도 소금이 영그는 염전이 있다.

고창CC의 시그니처홀인 바다코스 3번홀(파4) 티잉 구역에 올랐다. 눈이 시원했다. 그린 끝까지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다. 전장은 레드티 기준 284m, 화이트티 기준 334m. 함께 라운드한 박창열 고창CC 회장은 “백돌이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코스인 만큼 마음껏 휘둘러보라”며 웃었다.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코스

박 회장이 이 터를 만난 건 2002년이었다. 광주고 동문회에서 만난 동문이 “우리 회사가 땅을 내놨는데, 골프장 부지로 어떠냐”고 제안한 것. 건축학을 전공한 뒤 건설사에서 일했던 박 회장은 당시 전남 화순에서 남광주CC(현 화순 엘리체CC)를 운영하던 터였다. 건설과 골프장을 잘 아는 그는 한눈에 이 땅의 가치를 알아봤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었죠. 하지만 그림이 그려졌어요. ‘여기에 골프장을 지으면 누구나 편안하게 칠 수 있겠구나. 한국엔 이런 골프장이 거의 없으니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로 땅을 산 뒤 일본의 유명 건축가 사토 겐타로에게 설계를 맡겼다. 1973년부터 골프장을 설계해온 그는 ‘골프 코스는 웅장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전략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계 철학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박 회장은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편안한 코스로 만들어 달라는 것’. 고창CC의 트레이드 마크다.

“통상 골프는 3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런 골프장이 국내엔 별로 없습니다. 경사가 심해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기 힘든 골프장이 태반이죠. ‘어려워야 명문’이란 통념에 난도를 지나치게 높게 만든 골프장도 많고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좋은 골프장은 누구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골프장을 ‘18홀+3홀’로 조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면적이 76만㎡에 달하는 만큼 구겨 넣으면 27홀짜리 골프장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박 회장은 ‘넓고 긴’ 페어웨이를 위해 눈앞의 이익을 버렸다. 서해에서 흘러오는 바닷물을 이용해 워터해저드도 넉넉히 조성했다.

이렇게 18개 홀(푸른코스 9홀, 바다코스 9홀)을 만들고 모호하게 남은 땅에 3개 홀(하늘코스)만 넣었다. 얼핏 보면 ‘애물단지’ 같지만, 하늘코스는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효자다. 18홀만으론 아쉬움이 남는 골퍼들에게 3개 홀을 더 칠 수 기회를 1만원에 제공한다. 다른 골프장에선 볼 수 없는 고창CC만의 매력 포인트다. 코스 진행이 늦어질 때는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도 한다. 평소에는 국가대표와 유망주들의 훈련장이 된다. 현재 고창CC에서는 한국 최연소 국가대표인 안해천(16)을 비롯해 5명의 골프 꿈나무들이 미래의 타이거 우즈와 고진영을 꿈꾸며 스윙을 다듬고 있다.

최대 변수는 바닷바람

드라이버를 잡은 손을 서해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간지럽혔다.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잘 맞은 공은 170m 정도 날아가 페어웨이 오른쪽 끄트머리에 떨어졌다. 정중앙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바람의 힘이 셌다. 캐디는 “바람을 읽지 못하면 고창CC를 정복할 수 없다”고 했다.

바람이 부는 고창CC는 바람이 없는 고창CC와 완전히 다른 골프장이다. “염전이었던 곳이잖아요. 그래서인지 바람 자체가 강하고 무거워요. 바람이 제대로 불면 한두 클럽으론 안 되고 서너 클럽 정도 크거나 작게 잡아야 합니다.” 박 회장의 설명이다.

이날 핀은 두 개 그린 중 오른쪽에 꽂혀 있었다. 세컨드 샷을 하려고 보니 깃대가 바람에 쫙 펴져 있었다. 평소 거리보다 두 클럽 긴 5번 유틸리티를 잡고 그린을 똑바로 겨냥했다. 이번에도 공은 오른쪽으로 밀려 벙커로 빠졌다. 벙커샷으로 3온한 뒤 투 퍼트. 보기로 홀 아웃했다. 넓고 평평하지만, 바람 탓에 만만하게 볼 수만은 없는 홀이었다.

푸른코스 4번홀(파5)은 전장 578m(블루티 기준·화이트티는 551m)짜리 ‘롱롱 홀’이다. ‘거리 좀 난다’는 전국의 장타자들이 3온에 도전하지만, 통상의 파5홀보다 100m 이상 긴 탓에 고개를 떨구는 홀이다. 여기에 맞바람이라도 불면 장타자도 4온이 쉽지 않다. 푸른코스 9번홀(파4)은 눈은 즐겁지만, 마음은 아픈 홀이다. 페어웨이 우측으로 바다에서 넘어온 대형 해저드가 그린까지 이어져 상당한 압박감을 준다.

고창CC의 매력은 해질녘에 빛을 발한다. 서해의 검붉은 낙조가 탁 트인 골프장에 드리우면 코스의 얼굴도 바뀐다. 소금을 가득 머금은 서해 바람은 밀물이냐, 썰물이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르다.

이 골프장에는 가족 단위 골퍼가 많다. 남녀노소가 함께 라운드하기 좋게 설계한 덕분이다. 수도권 골퍼들은 주로 1박2일 코스로 찾는다. 이들을 맞을 38개 골프텔을 갖췄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서울에서 3시간 만에 닿을 수 있다.

고창=조수영 기자

대한민국 시그니처홀 시리즈는 골프 시즌이 본격 시작되는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