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사설] 꺾이지 말자!…넘지 못할 위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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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훈 논설실장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다.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 속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실물경기 하강이 엄중하고 경제 온도는 차갑게 식었다. 경제·산업·안보의 복합위기라고 하지만 위기의 성격과 진행 경로는 오리무중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1980년대 초 오일쇼크 정도일 텐데, 너무 오래전 일이어서 시의성을 포착하기 어렵다.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은 조금씩 완화하고 있다. 위기의 본질도 아니다. 올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단함은 지난 수십 년간 성장 기조를 떠받쳐온 자유무역 퇴조와 수출 경쟁력 약화다. 미국과 중국, 서방과 공산 진영 간 지정학적 격돌은 세계무역기구(WTO) 28년 체제를 와해하고 ‘프렌즈 블록(friends block)’이라는 단절적 국제관계와 각자도생의 전략을 강요하고 있다. 더 이상 우리가 기댈 곳은 없다. 모든 제조업에서 지구촌 전체를 상대하던 한국 산업의 전통적 강점은 약해지고 대외 의존도가 높고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한 태생적 한계는 부각된다.
한국은 세계 최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격돌하는 한복판에 갇혀 있다. 인구 5000만 명에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구가하지만 4대 열강과 비교하면 너무 작고 연약하다. 원전과 방산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지구상에서 핵무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부존자원을 살펴보면 더 기가 막힌다. 석유, 가스는 고사하고 희토류조차 구할 수 없다.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 없이 이렇게 철저하게 빈손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은 그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했다. 식량도, 에너지도 우리 수중에 없었다. 국민 생명 자원에 대한 자립적 안보가 불가능한데 무슨 수로 물가를 잡고 금리를 낮추겠나. 어떤 자원이든 무역 거래의 비교우위로 조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쟁은 여지없이 박살 냈다. 모든 질서에는 일몰이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우쳤다.
전대미문의 상황이어서 우리 특유의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기도 여의치 않다. 대부분 기업이 생존을 위한 현금 확보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활주로를 길게 만들어야 연착륙이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생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미래 투자다. ‘스탠드 스틸’은 국제 공조가 원활하고 재정·통화정책 여력이 풍부할 때 쓸 수 있는 카드다.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지난해 월드컵을 달군 ‘꺾이지 않는 마음’을 조용히 소환해본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술과 인재에 투자해야 한다. 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신차 개발이나 반도체 팹을 건설하는 데는 최소 5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지금 투자해야 몇 년 뒤 시장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시장을 누비는 한국 제품은 모두 이런 기다림에 대한 결과물이다.
사업 구조조정은 언제나 양방향이어야 한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것이다. 기존 사업 두 개를 정리하면 반드시 한 개의 새로운 투자를 한다는 ‘Cut two, Get one’ 전략을 영리하게 가동해야 한다. 위기는 언젠가 끝난다. 5년, 10년 뒤를 내다보고 지금 점프해야 한다. 미래가 완전히 안갯속인 것만도 아니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자동차 수소에너지 우주항공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다. 주식시장도 당장의 실적이 아니라 미래 성장성을 눈여겨본다. 불황기에는 모든 기업 주가가 떨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단하게 옥석을 가리는 과정이 펼쳐진다. 자본시장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에 기꺼이 돈을 몰아주고 주가를 끌어올린다.
중국 시장은 포기할 수 없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진 중국 시장을 접고 수출처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라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삼성 현대자동차 LG조차 고전하고 있는 현실과 한국산 제품 품질 및 브랜드 파워가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은 하나로 겹친다. 많은 기업이 “중국인들은 마음속으로 한국을 속국 취급하며 우리 상품을 경계하고 외면하는 습성이 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우리도 중국 소비자의 높아진 눈높이를 경시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선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하면서 중국에도 그만한 공을 들였는지 의문이다. 기업도 소비자도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도 각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대만의 상장사 시가총액(1조5760억달러)이 한국(1조6180억달러)과 대등한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TSMC라는 전략자산 육성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40년을 공들인 결과다. 1980년대 대만 정부가 대규모 재정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TSMC의 반도체 파운드리 패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TSMC 홀로 성장한 것도 아니다. 대만에는 연매출 10억달러가 넘는 반도체 기업이 30개에 육박한다. 한국의 포트폴리오는 대만보다 훨씬 탁월하다. 첨단산업과 전통 제조업 모두에서 뛰어난 기업과 전략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력 신장과 국방력 강화, 국부 창출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애플, 테슬라와 거래하는 TSMC가 중국의 대만 공격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재정 노동 교육 부문의 구조개혁만으로 경제 체질이 나아지고 산업 경쟁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기술과 산업, 경제와 안보의 유기적 연결과 융합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다. 산업 부문의 구조개혁 방향은 뚜렷하고 실질적이다. 첫째, 주요 산업을 국가 전략자원으로 재분류하는 것, 둘째는 한국에 대한 다른 국가의 의존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의 약점으로 지목돼온 대외의존도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는 것이다. 기업과 정부, 국민과 정치가 한 몸으로 움직이며 협력하고 의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목표다. 그 어떤 지정학적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적 역량을 구축하는 일은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조일훈 논설실장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은 조금씩 완화하고 있다. 위기의 본질도 아니다. 올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단함은 지난 수십 년간 성장 기조를 떠받쳐온 자유무역 퇴조와 수출 경쟁력 약화다. 미국과 중국, 서방과 공산 진영 간 지정학적 격돌은 세계무역기구(WTO) 28년 체제를 와해하고 ‘프렌즈 블록(friends block)’이라는 단절적 국제관계와 각자도생의 전략을 강요하고 있다. 더 이상 우리가 기댈 곳은 없다. 모든 제조업에서 지구촌 전체를 상대하던 한국 산업의 전통적 강점은 약해지고 대외 의존도가 높고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한 태생적 한계는 부각된다.
한국은 세계 최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격돌하는 한복판에 갇혀 있다. 인구 5000만 명에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구가하지만 4대 열강과 비교하면 너무 작고 연약하다. 원전과 방산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지구상에서 핵무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부존자원을 살펴보면 더 기가 막힌다. 석유, 가스는 고사하고 희토류조차 구할 수 없다.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 없이 이렇게 철저하게 빈손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은 그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했다. 식량도, 에너지도 우리 수중에 없었다. 국민 생명 자원에 대한 자립적 안보가 불가능한데 무슨 수로 물가를 잡고 금리를 낮추겠나. 어떤 자원이든 무역 거래의 비교우위로 조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쟁은 여지없이 박살 냈다. 모든 질서에는 일몰이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우쳤다.
'잘사느냐 못사느냐'가 아닌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섰다
선진국에 투자하는 시대가 왔다. 최대 시장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놓고도 많은 비용을 들여 미국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값싼 노동력과 비용을 좇아 신흥국으로 달려가던 투자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공급망과 시장을 일치시키라는 선진국의 요청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기업이 부품 업체를 하나 골라도 10년, 20년을 유지하는 것이 산업계 생리다. 국가 단위의 공급망 재편은 30년, 50년을 가는 와해적 변화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가 아닌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시대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기업의 비용 상승을 예고한다. 수익률 악화와 투자금 회수 지연이 불가피하다.전대미문의 상황이어서 우리 특유의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기도 여의치 않다. 대부분 기업이 생존을 위한 현금 확보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활주로를 길게 만들어야 연착륙이 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생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미래 투자다. ‘스탠드 스틸’은 국제 공조가 원활하고 재정·통화정책 여력이 풍부할 때 쓸 수 있는 카드다.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지난해 월드컵을 달군 ‘꺾이지 않는 마음’을 조용히 소환해본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술과 인재에 투자해야 한다. 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신차 개발이나 반도체 팹을 건설하는 데는 최소 5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지금 투자해야 몇 년 뒤 시장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시장을 누비는 한국 제품은 모두 이런 기다림에 대한 결과물이다.
사업 구조조정은 언제나 양방향이어야 한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것이다. 기존 사업 두 개를 정리하면 반드시 한 개의 새로운 투자를 한다는 ‘Cut two, Get one’ 전략을 영리하게 가동해야 한다. 위기는 언젠가 끝난다. 5년, 10년 뒤를 내다보고 지금 점프해야 한다. 미래가 완전히 안갯속인 것만도 아니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자동차 수소에너지 우주항공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다. 주식시장도 당장의 실적이 아니라 미래 성장성을 눈여겨본다. 불황기에는 모든 기업 주가가 떨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단하게 옥석을 가리는 과정이 펼쳐진다. 자본시장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에 기꺼이 돈을 몰아주고 주가를 끌어올린다.
중국 시장은 포기할 수 없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진 중국 시장을 접고 수출처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라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삼성 현대자동차 LG조차 고전하고 있는 현실과 한국산 제품 품질 및 브랜드 파워가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은 하나로 겹친다. 많은 기업이 “중국인들은 마음속으로 한국을 속국 취급하며 우리 상품을 경계하고 외면하는 습성이 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우리도 중국 소비자의 높아진 눈높이를 경시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선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하면서 중국에도 그만한 공을 들였는지 의문이다. 기업도 소비자도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도 각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대만의 상장사 시가총액(1조5760억달러)이 한국(1조6180억달러)과 대등한 규모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TSMC라는 전략자산 육성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40년을 공들인 결과다. 1980년대 대만 정부가 대규모 재정 투자를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TSMC의 반도체 파운드리 패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TSMC 홀로 성장한 것도 아니다. 대만에는 연매출 10억달러가 넘는 반도체 기업이 30개에 육박한다. 한국의 포트폴리오는 대만보다 훨씬 탁월하다. 첨단산업과 전통 제조업 모두에서 뛰어난 기업과 전략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력 신장과 국방력 강화, 국부 창출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애플, 테슬라와 거래하는 TSMC가 중국의 대만 공격에 대한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진단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재정 노동 교육 부문의 구조개혁만으로 경제 체질이 나아지고 산업 경쟁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기술과 산업, 경제와 안보의 유기적 연결과 융합이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다. 산업 부문의 구조개혁 방향은 뚜렷하고 실질적이다. 첫째, 주요 산업을 국가 전략자원으로 재분류하는 것, 둘째는 한국에 대한 다른 국가의 의존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의 약점으로 지목돼온 대외의존도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는 것이다. 기업과 정부, 국민과 정치가 한 몸으로 움직이며 협력하고 의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목표다. 그 어떤 지정학적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적 역량을 구축하는 일은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조일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