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수십 년간 경제는 ‘대안정(The Great Moderation)’의 시대였다. 인플레이션은 사라지고, 경제는 언제까지나 지속 성장할 것 같았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치긴 했지만 이내 수습됐고 세계 경제는 이후에도 10년 넘게 안정 성장을 거듭했다. 적절한 거시정책을 통해 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 커졌다.

인플레이션의 귀환은 이런 확신을 뿌리째 흔들었다. 코로나19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리고 ‘헬리콥터에서 돈 뿌리기’식으로 유동성을 풀 때만 해도 ‘인플레 경고’는 거의 없었다. 1970~1980년대 퇴치했다고 여겨진 인플레이션이 되살아나자 각국 중앙은행은 패닉에 빠졌다. 고물가를 잡기 위해 부랴부랴 금리를 올리면서 경제가 크게 휘청였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우리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못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고 ‘반성문’을 썼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교란 등 구조적 요인이 인플레 압력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하강하더라도 곧바로 물가가 떨어지지 않고 상당 기간 고물가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저물가 시대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안정 시대 끝…인플레의 귀환

40년 저물가 시대 끝나…"인플레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올해 세계경제 전망에서 “불황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안정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체제(New Regime)’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대안정 시대’가 끝났다는 전망이 확산되는 건 코로나19 이후 세계적으로 인플레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8.1%였던 주요 20개국(G20)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올해 6%, 내년엔 5.4%로 예상된다. 상당 기간 고물가가 이어지는 것이다. 블랙록은 “소비 패턴이 정상화되고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면 인플레이션이 둔화할 수 있지만 향후 몇 년 동안은 정책 목표(2% 안팎) 이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대안정 시대 끝…인플레의 귀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 목표치인 2%에 도달하는 중앙은행장은 거의 없을 것이며, 이것이 올바른 목표인지에 관한 논쟁도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산운용사 핌코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무함마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경제고문은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공급망, 유동성, 에너지 전환, 자원 재분배와 지난 10년의 저성장을 감안하면 물가 목표치는 3~4%로 올라야 한다”고 했다.

가속화하는 탈(脫)세계화는 ‘인플레이션의 뇌관’이 될 전망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망가진 글로벌 공급망은 미·중 갈등에 따라 더 분절화된 형태로 재편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인플레 압력 상승도 불가피해졌다. 과거엔 기업들이 생산비용을 낮출 수 있는 곳을 찾아 전 세계 어디든 공장을 지었다. 이는 세계적으로 값싼 물건이 공급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다. 하지만 이젠 안정적 공급망이 중요해졌다. 인건비와 원자재 가격이 훨씬 싸더라도 ‘상대 진영’ 국가와는 교역을 꺼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 그만큼 기업이 부담해야 할 원가는 오르고, 소비자의 부담은 커진다.

인구 고령화도 인플레 압력을 키우는 구조적 요인이다. 노동력 부족과 생산 감소를 일으키는 데다 정부가 고령층을 돌보는 데 전보다 더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찰스 굿하트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 교수는 저서 <인구 대역전>에서 특히 중국의 고령화 문제를 지적하며 “이제 더 이상 값싼 노동력이 무한히 공급되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과거엔 중국이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값싼 제품을 만들어 팔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중국이 전 세계 물가 압력을 낮추는 ‘디플레 수출국’에서 물가 상승 압력을 키우는 ‘인플레 수출국’으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후변화 역시 인플레 압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난해 곡물 가격 폭등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세계적인 가뭄이 배경이 됐다. 여기에 화석연료 투자 감소, 온실가스 배출규제는 기업의 생산비용과 소비자 가격 상승을 밀어올린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기후변화와 관련한 충격은 수요와 공급 측 경로를 통해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장기 인플레 시대엔 국가의 재정정책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고금리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저금리 시대처럼 마음껏 국채를 찍어 경기를 부양했다간 국가 재정이 망가지는 건 물론 국가 신용등급도 하락할 수 있다. 재정적자에 관한 고려 없이 적자국채를 찍으려다 결국 두 손을 든 영국이 대표적 반면교사다. 세계 6위의 경제대국이자 기축통화국 대접을 받는 영국조차 나랏빚이 과도하게 쌓이면 시장의 신뢰를 잃고 결국 정부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투자 전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월가 유명 투자자인 하워드 막스 오크트리캐피털 회장은 “향후 몇 년간 (미국의) 기준금리가 연 0~2%가 될 확률보다 연 2~4%에 달할 확률이 더 높다”며 “더 이상 위험한 투자에 크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대안정 시대에) 가장 잘 작동했던 투자 전략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