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세종은 왜 모내기를 금지했나?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신 세종은 즉위 11년차에 슬기로운 농민 생활을 위해 농사직설이라는 매뉴얼을 간행하셨다. 그런데 이 책에서 모내기(이앙법)를 매우 위험한 농법이라고 엄하게 금지했다.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튼튼한 모만 옮겨 심을 수 있어 수확이 크게 늘어난다. 모내기 전 빈터에 보리를 키울 수 있어 이모작도 가능했다. 벼를 물속에서 줄 맞춰 키우니 잡초 뽑기도 쉬웠다. 직파법 대비 노동력 투입은 5분의 1, 생산량은 두 배나 되는 신기술이었다. 7년 뒤 금지를 풀어달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어림도 없다!’로 일축하셨다.

왜 그랬을까? 다 좋지만 모내기철에 가뭄이 들면 신세를 망칠 수 있어서다. 물을 대지 못한 맨땅에 어찌 연약한 모를 꽂을 것인가? 난감한 일이다. 조선 전체에 이앙법을 도입했다가 가뭄이 들면 온 백성이 굶주릴 수 있으니 안전한 직파법을 고수할 수밖에.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이앙법이 일반화된다. 당연히 생산성이 올라가고 인구도 빠르게 증가했다. 뭔 일이 있었던 걸까?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해 지역마다 저수지를 만들어 리스크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남아 있는 저수지들은 조상님들의 땀으로 만들어낸 공공의, 그리고 후손들을 위한 인프라다.

30년 전, 한국은 창업엔 최악이었다. 물려받은 것 없이 아이디어 하나 믿고 퇴직금 털고, 친구들 보증으로 대출받아 창업한다? 처음에는 제법 잘나가도 경제위기가 닥치면? 그 가뭄에 지원해줄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엔 패가망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친이 창업한다고 설레발을 치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때려서라도 말릴 수밖에. 신농사직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각성을 했고 창업 생태계에 필요한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가 적극 나섰고 벤처캐피털, 사모펀드가 속속 등장하면서 창업 프로세스에 필요한 저수지가 조성됐다. 이젠 물려받은 게 없어도 아이디어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가능해졌다. 신저수지!

올해는 정말 어렵다고 한다. 성장기 스타트업은 더 어려울 거다. 이런 가뭄에 제 역할을 하라고 만든 게 신저수지다. 옥석은 가리되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은 버티도록 해야 미래가 밝아진다. 지금처럼 투자시장이 위축되는 시점부터 역할을 하라고 정부가 있는 것이다. 정부의 좀 더 강력한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저수지 그거? 관리하기에 따라 유용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의 힘으로 만든 만석보라는 저수지로 사욕을 채우려다 시작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수지는 공공, 미래 세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