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친구와 과감한 불륜'…연인 죽자 보인 광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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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포르투갈 왕 페드루 1세
아내 따라온 말동무 이네스와 '광적인 사랑'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 불리며
수백년 간 수많은 예술 작품 소재로
아내 따라온 말동무 이네스와 '광적인 사랑'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 불리며
수백년 간 수많은 예술 작품 소재로
1357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날이었거든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는 한껏 차려입은 시민들로 붐볐습니다. 노점상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푸른 하늘 높이 울려 퍼졌고요. 그야말로 완벽한 봄날이었습니다. 물론 궁전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있는 왕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조적으로, 행사에 참석한 포르투갈 귀족들과 신하들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모실 왕에게 잘 보여야 하니 기뻐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보통일 텐데요. 바닥만 내려다보는 사람,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태연하게 즉위식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입을 엽니다. “이제 모두 새로운 왕비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충성을 맹세하라.”
참석자들 사이에 경악과 공포가 번졌습니다. 그도 그럴 만했습니다. 옥좌에 앉아있는 왕비는 사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죽은 지 한참 오래돼서 다 썩어가는 시신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안 좋은 것도 시신에서 나는 냄새 탓이었습니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습니다. “지금 왕비를 모욕하는 것이냐?” 왕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습니다. “너희들이 내 아내를 이렇게 만든 것 아닌가?” 지금 말씀드린 스토리는 14세기 포르투갈의 왕 페드루 1세(1320~1367)와 그의 아내 이네스 카스트로(1325~1355)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춘향전을 알듯, 포르투갈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죠. 유럽에서도 꽤 유명해서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잔인한 버전’ 등의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시와 소설, 그림, 영화, 드라마까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졌고요.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두 나라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싱겁게 들리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베리아반도가 역사의 무대에 전격 데뷔한 건 고대 로마 제국의 땅이 된 기원전 29년.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부터는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고, 8세기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 전체는 비슷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이런 판도는 기독교 세력이 700여년에 걸친 국토 수복 운동(레콘키스타)을 벌이면서 뒤바뀌었습니다. 레콘키스타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교도를 몰아내자’고 부르짖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교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이때 이베리아반도는 일종의 ‘기회의 땅’이었거든요.
같은 종교를 믿는 귀족의 영지를 빼앗으면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지만, 이교도를 제거하고 영지를 빼앗는 건 칭찬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돈과 땅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것도 당연합니다. 반대편 종교 세력에 정보를 팔아넘기는 건 양반이고,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동맹을 맺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베리아반도에는 여러 세력이 난립하게 됐습니다. 포르투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9세기 백작령이 된 포르투갈 지역은 점차 국가의 정체성과 힘을 갖췄고, 1143년 ‘포르투갈 왕국’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맞아 최강국에 등극했다가, 스페인에 통합(1580)되고 다시 독립(1668년)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습니다만, 큰 탈 없이 오늘날까지도 그럭저럭 국가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뛰어난 외교력이 한몫했습니다.
포르투갈이 즐겨 쓴 외교 전략은 이웃이자 가장 위협적인 상대인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1340년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였던 스무 살의 페드루 왕자도 이런 정략결혼의 장기 말이 됐습니다. 상대방은 강력한 옆 나라인 카스티야의 공주. 공주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페드루는 강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문제는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이 공주가 아니라, 공주의 사촌이자 말동무 역할로 온 이네스였다는 겁니다. 이네스도 페드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둘은 열정적인 불륜 관계를 시작합니다. 도덕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당시 왕족이 따로 애인을 두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명의 사랑이 ‘찐 사랑’(진짜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바람에 소문은 페드루의 처가가 있는 카스티야 지역까지 퍼져나갑니다. ‘저러다 질리겠지 뭐’하고 별말 않던 페드루의 아버지 아폰수 4세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친하게 지내자고 정략결혼을 했는데, 되레 결혼 때문에 외교관계가 위태로워졌으니까요.
아폰수 4세는 둘을 갈라놓기 위해 이네스를 고향으로 추방하는 등 온갖 수단을 썼습니다. 이네스에게 노잣돈을 건네며 “이거 받고 내 아들이랑 헤어지게나”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거리 따윈 둘을 막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 주변의 비웃음 때문에 비참한 생활을 하던 공주는 시집온 지 5년 만인 1345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떴습니다.
‘사랑꾼’ 페드루는 이네스의 오빠들도 극진하게 챙겼습니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사냥도 다니며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죠. 이네스의 오빠들은 카스티야의 유력 귀족. 왕자가 옆 나라 귀족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론이 험악해집니다. “왕자를 그냥 놔뒀다간 나라가 카스티야 손에 넘어간다”는 소문까지 돌았고요. 고심하던 아폰수 4세, 결단을 내립니다.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네스를 아들과 영원히 떼놔야겠다.”
1355년 1월 7일. 왕의 명을 받은 세 명의 암살자가 이네스의 거처로 향합니다. 페드루가 사냥하러 나갔다는 건 이미 확인했습니다. 암살자들을 본 이네스는 죽음을 직감합니다. 먼저 협박. “내 남편이 알면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아?” 애원. “제발…제발 살려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리고 호소. “내 아이가 지금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어요. 제발 안 보이는 곳에서라도….” 잔혹한 암살자들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이네스의 목을 잘라 갑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페드루. 참혹한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힙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말 그대로 눈에서 피눈물이 흐릅니다. “이런 짓을 하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곧바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준비도 없이 격정에 사로잡혀 일으킨 반란이었기에, 반란은 머지않아 진압됐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진압된 직후 아폰수 4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페드루는 곧바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기사 첫머리에 언급한 사건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네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도 넘게 지난 1577년이 돼서야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얘기거든요. 이만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온갖 책에 이 얘기가 나왔겠지요. 옛날 사람들도 사실 짐작은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 400년 넘게 정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드루는 이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습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페드루는 이네스를 죽이고 해외로 도피한 암살자 세 명을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국제 수사 공조는 물론이고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추적팀은 1361년 옆 나라 카스티야에서 두 명을 잡아내고야 맙니다. “내 앞에 그 두 명을 데려오라. 내 심장을 뭉갠 놈들이니 나도 똑같이 해 주겠다.” 그리고 페드루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들의 심장을 도려냅니다. 페드루 말대로, 이네스는 그의 ‘인생의 사랑’이었습니다. 1360년 그는 선언합니다. “사실 나는 이네스와 비밀 결혼을 한 사이다. 이네스를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인정하라.” 감히 이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페드루는 이네스의 유해를 당시 포르투갈 왕족의 묘소였던 알코바사 수도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이 죽은 뒤 함께 묻힐 무덤을 짓고 관을 마련했습니다.
알코바사 수도원에 가면 지금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페드루와 이네스의 석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두 관을 마주 보게 배치한 건, 성경에 적힌 것처럼 심판의 날에 모든 죽은 자가 부활했을 때 가장 먼저 서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네스의 관에는 심판의 날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이네스의 모습이, 페드루의 관에는 둘이 사랑했던 추억과 비극적인 최후가 조각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떤 걸 배울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봐도 저마다 다른 교훈을 얻는 것처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를 대표적인 교훈으로 꼽는 듯합니다. “이네스는 죽었으니까”라는 표현이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뜻으로 쓰이니까요. 페드루는 얼마든지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인데, 비극적으로 끝난 사랑에 집착하다가 여러 무리수를 두고 4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점이 안타깝다는 의미겠죠. 페드루는 이네스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네스가 죽은 뒤 벌인 일들은 좀 후회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죽기 전 추적을 피해 도망친 암살자 한 명을 용서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후회가 스쳐 지나갔겠죠.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아버지와 좀 더 잘 이야기해 봤더라면, 그날 사냥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그에게 마지막 순간 나타난 사신은 이렇게 속삭였을지 모릅니다. “이미 늦었어, 이네스는 죽었으니까.”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새해도 벌써 보름이나 흘렀습니다. 신년 계획은 잘 지키고 계시는지요.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후회 없는 주말, 후회 없는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조적으로, 행사에 참석한 포르투갈 귀족들과 신하들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모실 왕에게 잘 보여야 하니 기뻐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보통일 텐데요. 바닥만 내려다보는 사람,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사람마저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태연하게 즉위식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입을 엽니다. “이제 모두 새로운 왕비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충성을 맹세하라.”
참석자들 사이에 경악과 공포가 번졌습니다. 그도 그럴 만했습니다. 옥좌에 앉아있는 왕비는 사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죽은 지 한참 오래돼서 다 썩어가는 시신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안 좋은 것도 시신에서 나는 냄새 탓이었습니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습니다. “지금 왕비를 모욕하는 것이냐?” 왕의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습니다. “너희들이 내 아내를 이렇게 만든 것 아닌가?” 지금 말씀드린 스토리는 14세기 포르투갈의 왕 페드루 1세(1320~1367)와 그의 아내 이네스 카스트로(1325~1355)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춘향전을 알듯, 포르투갈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죠. 유럽에서도 꽤 유명해서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잔인한 버전’ 등의 별명으로도 불립니다. 시와 소설, 그림, 영화, 드라마까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졌고요.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아내의 친구를 사랑한 남자
유럽 대륙의 왼쪽 아래, 북아프리카 바로 건너편. 이곳에 이베리아반도가 있습니다. 반도 땅 대부분은 스페인(면적 50만5990㎢)이 갖고 있습니다. 반면 포르투갈의 면적은 9만2090㎢로, 대한민국보다도 작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은 바다를 등지고 스페인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렇게 붙어 있는 나라들은 보통 허구한 날 싸웁니다. 한·중·일처럼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두 나라의 관계는 좋은 편이고, 언어·문화적으로도 아주 비슷합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두 나라는 하나로 합치지 않은 걸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두 나라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싱겁게 들리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베리아반도가 역사의 무대에 전격 데뷔한 건 고대 로마 제국의 땅이 된 기원전 29년. 이후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5세기부터는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고, 8세기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 지역 전체는 비슷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이런 판도는 기독교 세력이 700여년에 걸친 국토 수복 운동(레콘키스타)을 벌이면서 뒤바뀌었습니다. 레콘키스타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교도를 몰아내자’고 부르짖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교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이때 이베리아반도는 일종의 ‘기회의 땅’이었거든요.
같은 종교를 믿는 귀족의 영지를 빼앗으면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지만, 이교도를 제거하고 영지를 빼앗는 건 칭찬 받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돈과 땅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든 것도 당연합니다. 반대편 종교 세력에 정보를 팔아넘기는 건 양반이고,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동맹을 맺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베리아반도에는 여러 세력이 난립하게 됐습니다. 포르투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9세기 백작령이 된 포르투갈 지역은 점차 국가의 정체성과 힘을 갖췄고, 1143년 ‘포르투갈 왕국’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맞아 최강국에 등극했다가, 스페인에 통합(1580)되고 다시 독립(1668년)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습니다만, 큰 탈 없이 오늘날까지도 그럭저럭 국가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뛰어난 외교력이 한몫했습니다.
포르투갈이 즐겨 쓴 외교 전략은 이웃이자 가장 위협적인 상대인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1340년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였던 스무 살의 페드루 왕자도 이런 정략결혼의 장기 말이 됐습니다. 상대방은 강력한 옆 나라인 카스티야의 공주. 공주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페드루는 강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문제는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이 공주가 아니라, 공주의 사촌이자 말동무 역할로 온 이네스였다는 겁니다. 이네스도 페드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둘은 열정적인 불륜 관계를 시작합니다. 도덕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당시 왕족이 따로 애인을 두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명의 사랑이 ‘찐 사랑’(진짜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바람에 소문은 페드루의 처가가 있는 카스티야 지역까지 퍼져나갑니다. ‘저러다 질리겠지 뭐’하고 별말 않던 페드루의 아버지 아폰수 4세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친하게 지내자고 정략결혼을 했는데, 되레 결혼 때문에 외교관계가 위태로워졌으니까요.
아폰수 4세는 둘을 갈라놓기 위해 이네스를 고향으로 추방하는 등 온갖 수단을 썼습니다. 이네스에게 노잣돈을 건네며 “이거 받고 내 아들이랑 헤어지게나”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거리 따윈 둘을 막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 주변의 비웃음 때문에 비참한 생활을 하던 공주는 시집온 지 5년 만인 1345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떴습니다.
미친 사랑, 죽음, 광기
부인이 죽자마자 페드루는 기다렸다는 듯 이네스를 포르투갈로 다시 데려옵니다. 당시 사람들 기준에서도 이는 용납하기 힘든 짓이었지만, 사랑에 미친 둘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동거하며 자녀를 네 명이나 낳았지요. 다만 이네스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결혼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폰수 4세는 “세상에 여자가 걔밖에 없냐. 제발 지체 있는 집안의 공주와 재혼해라.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했지만, 말을 들을 페드루가 아닙니다. 이 말로 아버지 복장을 뒤집어 놨죠. “이네스는 제 인생의 사랑입니다.”‘사랑꾼’ 페드루는 이네스의 오빠들도 극진하게 챙겼습니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사냥도 다니며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눴죠. 이네스의 오빠들은 카스티야의 유력 귀족. 왕자가 옆 나라 귀족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론이 험악해집니다. “왕자를 그냥 놔뒀다간 나라가 카스티야 손에 넘어간다”는 소문까지 돌았고요. 고심하던 아폰수 4세, 결단을 내립니다.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네스를 아들과 영원히 떼놔야겠다.”
1355년 1월 7일. 왕의 명을 받은 세 명의 암살자가 이네스의 거처로 향합니다. 페드루가 사냥하러 나갔다는 건 이미 확인했습니다. 암살자들을 본 이네스는 죽음을 직감합니다. 먼저 협박. “내 남편이 알면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아?” 애원. “제발…제발 살려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리고 호소. “내 아이가 지금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어요. 제발 안 보이는 곳에서라도….” 잔혹한 암살자들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이네스의 목을 잘라 갑니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페드루. 참혹한 광경을 보고 말문이 막힙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말 그대로 눈에서 피눈물이 흐릅니다. “이런 짓을 하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곧바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준비도 없이 격정에 사로잡혀 일으킨 반란이었기에, 반란은 머지않아 진압됐습니다. 하지만 반란이 진압된 직후 아폰수 4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페드루는 곧바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기사 첫머리에 언급한 사건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네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도 넘게 지난 1577년이 돼서야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얘기거든요. 이만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온갖 책에 이 얘기가 나왔겠지요. 옛날 사람들도 사실 짐작은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 400년 넘게 정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드루는 이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습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페드루는 이네스를 죽이고 해외로 도피한 암살자 세 명을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국제 수사 공조는 물론이고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추적팀은 1361년 옆 나라 카스티야에서 두 명을 잡아내고야 맙니다. “내 앞에 그 두 명을 데려오라. 내 심장을 뭉갠 놈들이니 나도 똑같이 해 주겠다.” 그리고 페드루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들의 심장을 도려냅니다. 페드루 말대로, 이네스는 그의 ‘인생의 사랑’이었습니다. 1360년 그는 선언합니다. “사실 나는 이네스와 비밀 결혼을 한 사이다. 이네스를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인정하라.” 감히 이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페드루는 이네스의 유해를 당시 포르투갈 왕족의 묘소였던 알코바사 수도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이 죽은 뒤 함께 묻힐 무덤을 짓고 관을 마련했습니다.
알코바사 수도원에 가면 지금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페드루와 이네스의 석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두 관을 마주 보게 배치한 건, 성경에 적힌 것처럼 심판의 날에 모든 죽은 자가 부활했을 때 가장 먼저 서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네스의 관에는 심판의 날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이네스의 모습이, 페드루의 관에는 둘이 사랑했던 추억과 비극적인 최후가 조각돼 있습니다.
“이미 늦었어, 이네스는 죽었으니까”
이네스와 관련한 일만 아니라면 페드루는 의외로 좋은 왕이었습니다. ‘훌륭한 행정가이자 엄격한 법의 집행자, 능숙한 재정 관리자’라는 평가받았죠. 귀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습니다. 후대에는 “페드루 왕이 통치하던 10년이 포르투갈 최고의 전성기였다”는 말도 나왔습니다.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떤 걸 배울 수 있을까요. 같은 영화를 봐도 저마다 다른 교훈을 얻는 것처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를 대표적인 교훈으로 꼽는 듯합니다. “이네스는 죽었으니까”라는 표현이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는 뜻으로 쓰이니까요. 페드루는 얼마든지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인데, 비극적으로 끝난 사랑에 집착하다가 여러 무리수를 두고 47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점이 안타깝다는 의미겠죠. 페드루는 이네스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네스가 죽은 뒤 벌인 일들은 좀 후회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죽기 전 추적을 피해 도망친 암살자 한 명을 용서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병상에 누워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후회가 스쳐 지나갔겠죠. 더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아버지와 좀 더 잘 이야기해 봤더라면, 그날 사냥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그에게 마지막 순간 나타난 사신은 이렇게 속삭였을지 모릅니다. “이미 늦었어, 이네스는 죽었으니까.”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새해도 벌써 보름이나 흘렀습니다. 신년 계획은 잘 지키고 계시는지요. 지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후회 없는 주말, 후회 없는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