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도 잘 볼 줄 몰랐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테너[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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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테너' 하면 많은 분들이 이 사람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입니다. 친근하고 소탈한 외모와 인상, 아름다운 음색과 웅장한 목소리는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깊이 각인돼 있습니다.
파바로티의 생애를 다룬 론 하워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파바로티'(2020)엔 그의 생전 인터뷰, 노래하는 모습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데요. 그는 "100년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합니다. "오페라를 친근하게 느끼게 해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 덕분인지 파바로티가 부른 오페라 아리아와 그의 음성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오페라 '투란도트'의 '네순 도르마(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파바로티의 시그니처 곡으로 유명하죠. 오페라와 성악을 잘 즐기지 않는 분들도 많이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파바로티는 제빵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성가대 활동을 하며 노래를 익혔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던 19살 때 "너의 목소리는 나를 크게 감동시킨다"라는 어머니의 응원을 듣고, 성악가로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음악 학교를 다닌 적도 없던 파바로티가 무대에 오를 기회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악보도 제대로 볼 줄 몰랐습니다. 대본을 잘 외우지도 못했고 연기조차 어색했죠. 몸집이 커 멋진 주인공 역을 따내는 데도 한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끊임없이 연습하며 자신을 단련시켰습니다. 악보를 잘 못 읽어도 자신만의 표시로 음악을 익히고 기록했죠.
그리고 마침내 26살이 되던 해, 이탈리아에서 열린 '아칼레 페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습니다. 이후엔 오페라 '라 보엠'을 시작으로 '투란도트' '사랑의 묘약' '리골레토' 등 수많은 오페라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파바로티가 꿈꿨던 대로 '네순 도르마'를 비롯해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라 보엠'의 '그대의 찬 손' 등 많은 오페라 아리아가 그를 통해 더욱 사랑받게 됐죠. 그에겐 '하이C의 제왕'이란 별명도 생겼습니다. 37세에 출연한 오페라 '연대의 딸'에서 수차례 3옥타브 도에 해당하는 하이C를 불러 생겨난 별명입니다. 그만큼 파바로티는 높은 음역대에서 맑고도 폭발적인 성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벨 칸토 창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벨 칸토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그 의미처럼 아름답고 매끈하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르죠. 음과 음 사이가 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파바로티는 벨 칸토 창법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파바로티는 노래뿐 아니라 연기의 폭도 점차 넓혀 나갔습니다. 그래서 상류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사실주의 오페라 '베리스모 오페라'에도 출연하게 됐습니다. 다른 오페라들에 비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한 연기력이 필요했는데, 파바로티는 이 또한 매끄럽게 소화해 냈습니다.
뛰어난 실력 덕분에 역사상 파바로티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테너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와 함께 3대 테너로 불렸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가운데서도 인기가 가장 많았죠. 파바로티는 53세에 영광스러운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관객들이 공연이 끝난 후 1시간 7분에 달하는 박수를 쏟아낸 겁니다. 파바로티는 계속되는 앙코르 요청에 165번이나 무대 밖으로 나갔다 다시 올라왔죠.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한 영향도 컸습니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매년 전쟁 난민과 고아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열었습니다. 여기엔 스티비 원더,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 등 유명 스타들이 총출동했죠.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가 함께 '쓰리 테너 콘서트'를 연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 명의 테너들이 모여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시작해 월드컵이 열리는 4년마다 콘서트를 개최한 겁니다. 이들이 함께 한 무대 영상은 지금 봐도 짜릿한 전율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세 명이 함께 한 마지막 콘서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 차례로 공연을 열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엔 아쉽게도 함께 하지 못했는데요. 파바로티가 췌장암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 가운데 오페라는 유독 장벽이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누구나 재밌게 감상할 수 있는 장르입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함께 아름다운 아리아도 즐길 수 있죠. '오페라를 친근하게 만든 사람'이고 싶어 했던 파바로티의 생전 노래들을 들으며 오페라와 가까워져 보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