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컨벤션센터에서 12~15일 열린 ‘제1회 아트SG’를 앞두고 지난 5일 이렇게 보도했다. 처음 데뷔하는 행사에 대해 세계적인 언론이 이런 전망을 내놓은 것은 아트SG의 든든한 ‘뒷배’를 봤기 때문이다. 프리즈와 함께 세계 양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아트바젤의 모기업 MCH그룹이 싱가포르를 새로운 ‘아시아 미술 허브’로 만들기 위해 준비한 행사가 아트SG다. 싱가포르의 탄탄한 인프라와 지리적 이점 등을 감안할 때 앞으로 서울, 도쿄, 홍콩과 벌일 아시아 미술 허브 경쟁에서 싱가포르가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점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아트페어만 놓고 보면 서울이 한 수 위’란 평가가 많았다. 지난 11~15일 아트SG 행사장에서 만난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은 “프리즈 서울-KIAF(한국국제아트페어)가 아트SG보다 VIP 고객·전시 구성 면에서 뛰어났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이 싱가포르에 비해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인지,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거듭나려면 어떤 과제가 남아 있는지 등을 미술계 인사들에게 물었다.
"기대 못미친 아트SG…흥행·다양성 서울이 압승"

고객층·행사 구성은 韓 ‘승리’

흥행 측면에선 서울의 ‘압승’이었다. 유럽 명문 갤러리 타데우스로팍의 타데우스 로팍 대표는 기자와 만나 “싱가포르에선 중국·일본·동남아시아·호주 등 다양한 국적의 컬렉터를 만날 수 있지만, 진짜 작품을 구매하는 VIP 고객은 서울에 더 많다”며 “VIP 오프닝 첫날 판매 실적만 봐도 프리즈 서울이 아트SG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작년 프리즈 서울과 올해 아트SG에 모두 참석한 독일 갤러리 페레스프로젝트의 하비에르 페레스 대표도 “서울에선 실제 작품을 산 ‘알짜 고객’이 많았다”고 했다.

중국 고객 의존도가 높은 게 아트SG의 약점이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준모 미술평론가(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아트SG의 ‘동력’인 중국 ‘큰손’들이 코로나19 방역과 중국 정부의 감시 등으로 싱가포르를 찾지 못한 게 타격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아트SG에 참가한 갤러리 사이에서 ‘판매 실적이 예상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해외 미술 전문지 아트넷은 13일 “아트SG의 초기 판매 부진은 ‘과연 싱가포르가 홍콩·서울과 겨룰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고 보도했다. 홍콩은 3월 ‘아트바젤 홍콩’을, 도쿄는 7월 ‘도쿄 겐다이’를 연다. 서울은 9월에 제2회 프리즈 서울-KIAF를 개최한다.

전시 구성과 부대행사 역시 프리즈 서울이 앞섰다는 평가다. 현지에서 만난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프리즈 서울이 피카소·리히텐슈타인 등 ‘마스터즈’ 섹션으로 많은 볼거리를 준비한 반면, 아트SG는 거의 다 동시대 작가들이었다”고 했다.

아트컬렉터인 이소영 조이뮤지엄 대표는 “아트SG가 열린 시기에 ‘SEA FOCUS’도 진행돼서 신진 작가들의 미술품을 만날 수 있는 등 가격대를 다양하게 한 것은 장점”이라며 “다만 아트페어는 작품 판매뿐 아니라 미술계 인사와 컬렉터 간의 교류가 중요한데, 아티스트 토크 프로그램이나 파티 등 교류 행사는 아무래도 두 개 페어가 연합해 진행한 프리즈 서울-KIAF가 더 많았다”고 평가했다.

“자생력 높이고, 규제 완화해야”

안심하긴 이르다.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면 싱가포르행(行) 항공권을 사는 중국 컬렉터가 늘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은 돈을 따라 움직이는데, 아시아 금융 중심지는 서울이 아니라 싱가포르다.

한국 갤러리 중 최초로 싱가포르에 분점을 낸 더컬럼스의 장동조 대표는 “싱가포르 정부는 코로나19 기간 갤러리 임대료 보조, 미술품 보세지역 구축 등 국가적으로 미술산업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정 평론가는 “일본도 최근 미술품 관련 세금을 낮추는 등 각국이 미술산업 부흥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는 상황”이라며 “한국이 손 놓고 있다간 이들에게 허브를 뺏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리즈 서울 흥행에 안주하지 말고 KIAF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세계 유명 갤러리를 160여 개나 유치한 아트SG처럼 KIAF도 독자적으로 세계적인 갤러리를 불러올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프리즈가 계약기간(5년)이 끝나면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아시아 미술 수도’가 어느 하나로 좁혀지기보다는 다원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페레스 대표는 “아시아 미술시장이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각국의 미술 허브 경쟁은 서로 시장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파이를 키우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라며 “각기 다른 장점을 가진 아시아 도시들이 해당 지역의 작은 허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싱가포르=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