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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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고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거기까지 키워준다. 고등학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을 목표로 한다. 그다음부터는 네 힘으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만 가볍게 해석했던 저 말을 아버지는 지켰다. 나는 졸업하고 나서야 깨닫고 따랐다. 아버지는 한 푼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지적했다.
한참 자란 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했다. “네 할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가르침이다”라면서 종오소호(從吾所好)란 고사성어를 가르쳐줬다. 종오소호는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원문은 “부유해지려 해서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 잡는 일일지라도 내 기꺼이 하겠다. 그러나 부유해질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채찍 잡는 일은 천한 직업인 마부를 말한다. 아버지는 “사람은 모두 부유하길 바란다. 공자 또한 그랬다. 부유해지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느냐? 더욱이 떳떳하게 부유해지는 일이란 어렵다. 공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간서치(看書癡)’로 평가했다. 낯선 단어였다. 뒤에 찾아보니 간서치는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마흔둘에 자식을 얻은 내 증조부를 제치고 82세에 손자를 본 고조부가 나서서 곁에 끼고 사서삼경을 비롯해 한학을 모두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96세에 돌아가실 때 내 할아버지는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는 “귀한 손이라 더욱 엄하게 가르쳐 모르는 글이 없었다고 들었다”라고 술회했다. 학문에만 열중하게 했던 고조부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꾸짖어 결국 내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못 했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도 스무 살에 얻은 내 아버지를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냇가 느티나무 밑 모래판에다 글자를 써서 가르치셨다. 천자문, 소학, 사서삼경 순으로 가르친 게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글자를 가르쳤다. 겨울이면 화로 안 재에다 글씨를 썼다 지우며 가르쳤다. 내가 살아가며 배울 한문을 그때 모두 배웠다”라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머리 비상하고 하고 싶은 게 참으로 많았을 네 할아버지는 어른들의 기대와 간섭을 견디지 못해 남들이 정신병이라 부르는 심화병을 얻어 십수 년을 고생하다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며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할아버지는 그런 경험 때문에 내 아버지에게 ‘종오소호’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군에서 전상을 입고 집에 돌아왔을 때 병석의 할아버지가 크게 슬퍼하신 게 많이 기억난다. 하고 싶은 일 참 많았는데 언제나 장애인이라는 딱지가 하나 남은 다리마저 붙잡아 뜻을 펴지 못했다”라며 한탄했다. 아버지는 “성한 다리로 펄펄 뛰어다니며 네 인생을 살아보라”며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종오소호를 선물했다.
이 글을 쓰다 아버지가 묻힌 대전현충원을 찾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올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1인 2역 하며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가 일찍 놓아주신 덕분에 성에는 안 차시겠지만, 이만큼이라도 컸습니다. 하고 싶은 일 많아 여러 곳을 기웃거렸지만 성한 다리로도 힘에 부치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그래도 한 가지는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종오소호는 물려줬습니다.” 독립심은 부모의 자식 놓아주기가 먼저다. 욕심 생겨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독립심은 발걸음 뗄 때 가르치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예쁜 자식을 놓아주기는 참으로 어렵고 귀여운 손주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한참 자란 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했다. “네 할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가르침이다”라면서 종오소호(從吾所好)란 고사성어를 가르쳐줬다. 종오소호는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원문은 “부유해지려 해서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 잡는 일일지라도 내 기꺼이 하겠다. 그러나 부유해질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채찍 잡는 일은 천한 직업인 마부를 말한다. 아버지는 “사람은 모두 부유하길 바란다. 공자 또한 그랬다. 부유해지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느냐? 더욱이 떳떳하게 부유해지는 일이란 어렵다. 공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를 ‘간서치(看書癡)’로 평가했다. 낯선 단어였다. 뒤에 찾아보니 간서치는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마흔둘에 자식을 얻은 내 증조부를 제치고 82세에 손자를 본 고조부가 나서서 곁에 끼고 사서삼경을 비롯해 한학을 모두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96세에 돌아가실 때 내 할아버지는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는 “귀한 손이라 더욱 엄하게 가르쳐 모르는 글이 없었다고 들었다”라고 술회했다. 학문에만 열중하게 했던 고조부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꾸짖어 결국 내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못 했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도 스무 살에 얻은 내 아버지를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냇가 느티나무 밑 모래판에다 글자를 써서 가르치셨다. 천자문, 소학, 사서삼경 순으로 가르친 게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글자를 가르쳤다. 겨울이면 화로 안 재에다 글씨를 썼다 지우며 가르쳤다. 내가 살아가며 배울 한문을 그때 모두 배웠다”라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머리 비상하고 하고 싶은 게 참으로 많았을 네 할아버지는 어른들의 기대와 간섭을 견디지 못해 남들이 정신병이라 부르는 심화병을 얻어 십수 년을 고생하다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당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며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할아버지는 그런 경험 때문에 내 아버지에게 ‘종오소호’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군에서 전상을 입고 집에 돌아왔을 때 병석의 할아버지가 크게 슬퍼하신 게 많이 기억난다. 하고 싶은 일 참 많았는데 언제나 장애인이라는 딱지가 하나 남은 다리마저 붙잡아 뜻을 펴지 못했다”라며 한탄했다. 아버지는 “성한 다리로 펄펄 뛰어다니며 네 인생을 살아보라”며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종오소호를 선물했다.
이 글을 쓰다 아버지가 묻힌 대전현충원을 찾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올리고 대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내가 1인 2역 하며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가 일찍 놓아주신 덕분에 성에는 안 차시겠지만, 이만큼이라도 컸습니다. 하고 싶은 일 많아 여러 곳을 기웃거렸지만 성한 다리로도 힘에 부치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그래도 한 가지는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종오소호는 물려줬습니다.” 독립심은 부모의 자식 놓아주기가 먼저다. 욕심 생겨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독립심은 발걸음 뗄 때 가르치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예쁜 자식을 놓아주기는 참으로 어렵고 귀여운 손주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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