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90년대 들썩이게 한 '슬롯머신 사건' 수사 허락한 지검장
1993년 정·관계 인사들이 연루된 ‘슬롯머신 사건’이 터졌다. 서울지검 강력부가 슬롯머신 업계와 이들의 배후 세력에 대한 전면 수사를 벌인 결과, 슬롯머신 업계 대부 정덕진과 박철언 국민당 의원, 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 등이 구속기소됐다. 박종철 검찰총장이 경질됐고, 파면된 공무원만 30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의 주임 검사는 홍준표 현 대구시장이다. 하지만 검사실 캐비닛 속에 잠자고 있던 사건을 끄집어낸 건 송종의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다.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은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거쳐 법제처장까지 지낸 그의 회고록이다.

저자는 대검 강력부장 시절인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이끌었고, 대전지검장 때인 1991년 오대양 집단 살해 암매장 사건을 지휘했다. 1993년 3월 서울지검장으로 발령받은 그는 전임 검사장이 뭉개고 있던 슬롯머신 사건 수사 착수를 허락했다. 저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취임식에서 무엇이라 했던가? 검사의 직무 수행 중에 발견되는 비리와 부정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수사해 응징하라는 결연한 의지가 포함돼 있지 않았던가? 검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신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찰 고위직까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지만 반려됐다. 법제처장으로 공직을 마친 뒤에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충남 논산에서 밤나무를 키워 ‘밤나무 검사’로 불렸다.

그는 “공직 생활 중 저지른 잘못을 가감 없이 드러내 공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를 거울삼아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책을 썼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