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비 조달도 전략'…영란은행이 숨기고 싶던 이야기 [홍기훈의 슬기로운 금융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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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머니이스트
전쟁 규모 커지며 전쟁 비용도 급증
"자금조달 실패는 국민의 사기를 저하할 수 있다"
영란은행, 화폐 발권력 이용해 전쟁자금 조달
전쟁 규모 커지며 전쟁 비용도 급증
"자금조달 실패는 국민의 사기를 저하할 수 있다"
영란은행, 화폐 발권력 이용해 전쟁자금 조달
지난 칼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란은행이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전에 유럽이 경험하지 못한 규모였습니다. 불과 50여년전 발발했던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양측이 동원한 총병력은 200여만명 수준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인 사망자만 10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전쟁의 규모와 이로 인한 자원 소모는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전쟁의 주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 정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펼쳐지는 동안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4%에 달하는 1906억 달러가 투입됐습니다. 영국은 자그마치 38년 치 예산을 이 전쟁에 쏟아부었습니다.
당시 천문학적인 전비를 조달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세금, 해외차입 그리고 국내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참전국이 세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다만 주로 사용한 방식엔 차이를 보였습니다. 미국은 세금으로 많은 전비를 조달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국채발행이, 후기에는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했습니다. 독일은 국채발행이 가장 중요한 전비 조달 방식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쉬운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국채를 발행한 정부는 국채를 팔아 자본을 조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 어느 나라의 국민도 정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경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각 나라의 중앙은행은 국민이 국채를 구입할 수 있도록 돈을 찍어냈습니다. 이후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올라 경제에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1914년 당시 전쟁을 치르기 위해 3억5000만 파운드의 10년 만기 전쟁채권 판매를 시도했습니다. 영국 정부가 전쟁채권을 발행하겠다고 발표하자, 영국의 은행들은 6000만 파운드의 채권을 인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는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고객예금과 신용의 10%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3940만 파운드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1914년 발행된 전쟁채권은 연 4.1%의 이자를 제공해 연 2.5% 수준이었던 정부 채권보다 매력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자금조달은 쉽지 않았습니다. 대중에게 판매하려던 2억5000만파운드 가운데 9110만 파운드만 판매가 완료됐습니다. 부채 구매자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이익을 볼 것이라 예상되는 운송회사와 몇몇 돈 많은 개인들이었습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한데,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대중에게 '대부분의 국민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정부가 시작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이 전쟁채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고 인식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14년 11월 2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는 "초과 신청된 전쟁채권"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엔 "전쟁채권이 2억 5000만 파운드나 초과 신청됐고, 현재도 계속해서 지원자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전쟁채권을 실제로 완판하기 위해 영란은행은 돈을 찍어내서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대부분을 직접 매수합니다. 당연히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채권이 완판되자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과거 장부를 점검하던 역사학자들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15년 경제학자 케인즈는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브래드버리에게 비밀 문건을 써 영란은행과 재무부를 칭찬했습니다. 행정실패로 기록될 수 있었던 사안을 '능수능란한 대차대조표 조작'을 통해 감춘 것을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고삐가 풀린 영란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한 전쟁자금 조달은 이후 애용됩니다. 1916년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서부전선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17년에 영국정부는 연 이자율 5.4%에 20억 파운드에 달하는 전쟁채권을 발행했습니다.
1915년 영국 투자자들의 신규증권 인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이후 민간자금이 전쟁채권으로 많이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채권의 많은 부분을 영란은행이 인수해 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대규모 채권 발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전에 유럽이 경험하지 못한 규모였습니다. 불과 50여년전 발발했던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양측이 동원한 총병력은 200여만명 수준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인 사망자만 10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전쟁의 규모와 이로 인한 자원 소모는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전쟁의 주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 정부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펼쳐지는 동안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4%에 달하는 1906억 달러가 투입됐습니다. 영국은 자그마치 38년 치 예산을 이 전쟁에 쏟아부었습니다.
당시 천문학적인 전비를 조달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세금, 해외차입 그리고 국내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참전국이 세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다만 주로 사용한 방식엔 차이를 보였습니다. 미국은 세금으로 많은 전비를 조달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초기에는 국채발행이, 후기에는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했습니다. 독일은 국채발행이 가장 중요한 전비 조달 방식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쉬운 방법은 국채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국채를 발행한 정부는 국채를 팔아 자본을 조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 어느 나라의 국민도 정부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경제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각 나라의 중앙은행은 국민이 국채를 구입할 수 있도록 돈을 찍어냈습니다. 이후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올라 경제에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1914년 당시 전쟁을 치르기 위해 3억5000만 파운드의 10년 만기 전쟁채권 판매를 시도했습니다. 영국 정부가 전쟁채권을 발행하겠다고 발표하자, 영국의 은행들은 6000만 파운드의 채권을 인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는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고객예금과 신용의 10%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3940만 파운드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1914년 발행된 전쟁채권은 연 4.1%의 이자를 제공해 연 2.5% 수준이었던 정부 채권보다 매력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자금조달은 쉽지 않았습니다. 대중에게 판매하려던 2억5000만파운드 가운데 9110만 파운드만 판매가 완료됐습니다. 부채 구매자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이익을 볼 것이라 예상되는 운송회사와 몇몇 돈 많은 개인들이었습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한데,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에 돈을 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대중에게 '대부분의 국민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정부가 시작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이 전쟁채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고 인식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14년 11월 2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는 "초과 신청된 전쟁채권"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엔 "전쟁채권이 2억 5000만 파운드나 초과 신청됐고, 현재도 계속해서 지원자가 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전쟁채권을 실제로 완판하기 위해 영란은행은 돈을 찍어내서 정부가 발행한 채권의 대부분을 직접 매수합니다. 당연히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채권이 완판되자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과거 장부를 점검하던 역사학자들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1915년 경제학자 케인즈는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브래드버리에게 비밀 문건을 써 영란은행과 재무부를 칭찬했습니다. 행정실패로 기록될 수 있었던 사안을 '능수능란한 대차대조표 조작'을 통해 감춘 것을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고삐가 풀린 영란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한 전쟁자금 조달은 이후 애용됩니다. 1916년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서부전선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17년에 영국정부는 연 이자율 5.4%에 20억 파운드에 달하는 전쟁채권을 발행했습니다.
1915년 영국 투자자들의 신규증권 인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이후 민간자금이 전쟁채권으로 많이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채권의 많은 부분을 영란은행이 인수해 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대규모 채권 발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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