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대통령은 국민연금을 좌우할 권리가 없다
“국민연금이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면 ‘스튜어드십은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코멘트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KT와 포스코, 금융사 등 이른바 ‘소유 분산 기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스튜어드십이 작동돼야 한다”고 한 뒤 한 경제계 관계자가 꺼낸 얘기다.

국민연금은 전체 운용자산의 15.1%에 해당하는 138조원(작년 11월 말 기준)을 국내 증시에 투자하고 있다. 상장기업의 전체 시가총액(2296조원)의 약 6.0%다. 주요 대기업만 따지면 지분 비율이 더 올라간다. 소유 분산 기업에선 국민연금을 견제할 곳이 아예 없다. KT(9월 말 기준 지분율 10.74%) 포스코홀딩스(8.50%) 신한금융지주(8.22%) KB금융지주(7.97%) 우리금융지주(7.86%, 우리사주조합 제외시) 하나금융지주(8.40%) 등의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느냐다. 현 정부는 지난 정부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국민연금을 ‘쌈짓돈’으로 여기는 인식은 오십보백보로 보인다.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연금 의결권에 개입하려 한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금융위 업무보고에서 직접 ‘셀프 연임’과 ‘스튜어드십’을 연결 지어 언급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을 활용해 기업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공언한 셈이기 때문이다. 보도가 쏟아지자 대통령실 관계자가 “특정 기업이나 CEO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

국민연금 관계자들은 ‘툭하면 연금 사회주의라며 권리 행사를 못 하게 하는 분위기가 맞느냐’며 억울해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를 살펴보겠다는 취지로 말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느끼지 못하는 현 상황 자체가 국민연금이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방증한다.

국민연금은 국내 증시에서 연못 속 고래와 같은 존재다. 너무 덩치가 커서 조금만 움직여도 모두가 따라 출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국민연금은 정부 것’이라는 등식을 먼저 깨야 한다. 국민연금을 분할 운용하고, 의결권 행사도 분산 위탁하는 방안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시장이 국민연금을 중립적인 존재로 인식할수록 연금의 의결권 행사 폭도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