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본사를 둔 A사는 아직 세계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는 방식의 항암제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사람 대상 임상의 첫 관문인 임상 1상은 국내가 아니라 미국에서 진행 중이다.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우선 국내에선 임상 허가를 받기가 수월치 않아서다.

국내 혁신 신약 개발 바이오벤처 중에는 A사처럼 국내를 건너뛰고 미국 임상을 택한 사례가 적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새로운 방식의 신약후보물질 임상과 품목 허가에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임상컨설팅업계 관계자는 “임상 허가를 내줬다가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문제 등의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유럽 등 해외 분위기는 다르다. 약물의 안전성만 확보되면 임상 허가를 받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임상 허가를 내주되 효능을 입증하는 건 어디까지나 회사 몫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임상 결과에 따른 평가는 시장에서 받으면 된다는 시각이다. 실제 미국 바이오기업 바이오젠이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 ‘아두헬름’은 효능이 뛰어나지 않다는 전문가 의견이 우세했음에도 미 식품의약국(FDA)은 허가를 내줬다. 치료제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선 환자가 선택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렇다보니 국내에선 혁신 신약이 나오길 기대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선 지금까지 없던 기술을 찾는 데 집중하지만 한국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모험에 가깝다”고 했다.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신약 개발 역량이 급성장한 만큼 규제당국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식약처의 보신주의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긴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FDA에 비해 식약처의 예산과 전문성이 크게 부족한 구조적 현실 때문이다. 식약처에 신약 허가 심사를 받을 때 내는 심사수수료는 800만원 수준이지만 FDA는 30억원이 넘는다. 심사 인력도 FDA는 1700여 명이지만 식약처는 350여 명에 그친다.

업계 관계자는 “혁신 신약이 국내에서 개발되는 환경을 만들려면 규제기관인 식약처의 경쟁력부터 높여야 한다”고 했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