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작년 말 기준 국내엔 커피·음료점이 9만9000개가량 있다. 인구 500명당 한 개다. 그런데도 계속 생긴다. 조금 과장하면 한 집 건너 카페다. 편의점 근처에 편의점이 또 생기고, 제과점 맞은편에 다른 제과점이 들어선다. 닭갈비 골목, 국밥 골목, 횟집 거리, 화장품 거리처럼 동종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왜 모일까? 다른 곳에 가게를 내면 ‘독점’을 누릴 수 있는데….

바닷가에 카페를 차린다면?

스타벅스 옆 투썸…굳이 코앞에 점포 내는 속내는
가상의 상권을 생각해 보자. 어느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백사장의 길이는 2㎞다. 별커피와 콩커피가 점포를 하나씩 내기로 했다. 관광객은 해변 전역에 고르게 분포해 있고, 두 커피집의 커피 맛과 가격은 같으며 소비자 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은 커피점까지의 거리뿐이라고 하자.

처음에 두 점포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자리 잡았다. 해변 정중앙을 중심으로 각각 1㎞ 안에 있는 고객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위치였다. 어느 날 별커피가 해변 중앙에 가까운 쪽으로 점포를 옮겼다. 그러자 콩커피에 가던 손님 중 일부가 별커피로 발길을 돌렸다. 손님을 빼앗긴 콩커피도 해변 중앙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국 두 점포는 해변 한가운데서 이웃한 위치에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시장에서 공급자들이 차별화하기보다는 비슷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호텔링의 법칙 또는 호텔링 모형이라고 한다. 미국의 수리경제학자 해럴드 호텔링이 1929년 ‘경쟁의 안정성(Stability in Competition)’이라는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호텔링의 법칙에 따르면 경쟁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보다 경쟁자와 가까운 곳이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리한 입지가 된다.

유명 브랜드의 출점 전략

호텔링의 법칙이 설명하는 현상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된다. 대도시 번화가에서는 동종 업계 점포들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들어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동일 브랜드 점포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곳도 많다. 모 브랜드는 스타벅스 옆에 점포를 내는 것이 출점 전략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전략을 쓴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호텔링의 법칙에 따르면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물리적 거리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많은 기업이 가격과 품질, 심지어는 이름까지 엇비슷한 상품을 내놓는다. 애플이 아이폰으로 시장 판도를 바꾸자 삼성이 갤럭시S로 추격에 나섰고, 삼성이 갤럭시노트를 내놓자 애플도 아이폰의 화면 크기를 키웠다. 이 또한 더 많은 소비자를 잡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각 기업의 상품이 서로 닮아간다는 호텔링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유권자들이 이념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평균적으로 분포하고,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이 하나씩 있다면 각 정당은 중도층에 먹힐 만한 메시지를 내놓는 것이 선거 전략상 유리하다. 그런 식으로 좌파 정당은 우클릭, 우파 정당은 좌클릭을 하다 보면 두 정당의 정책이 유사해진다.

‘평균 전략’의 득과 실

기업들이 호텔링의 법칙을 따른다면 소비자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경쟁의 결과 품질도 서비스도 가격도 비슷해져 선택 폭이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해변 커피점을 예로 든다면 두 커피점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 관광객 입장에서는 좋다. 그래야 해변 어디서든 커피점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호텔링의 법칙은 기업이 물리적 위치든 품질이든 가격이든 중간 지점에 자리 잡는 것이 시장 경쟁을 헤쳐 나가는 데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브랜드 인지도가 낮은 후발 주자라면 이런 전략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차별점이 없는 상품과 서비스로 기존 강자들 틈에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발 주자가 놓치고 있는 틈새를 공략해 시장을 넓혀가는 것이 현명한 전략일 수 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