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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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법인세를 많이 내겠습니다."

지난해 한 정유업계 최고경영자(CEO)가 '횡재세' 논란에 관해 묻자 이같이 답했다. 한국의 법인세는 누진세율을 적용받아 수익이 불어날수록 법인세율이 올라간다. 사실상 횡재세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의 법인세는 우리와 달리 단일세율을 적용한다. 석유를 직접 채굴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미국·영국 에너지 기업은 한국과 달리 횡재세를 징수할 근거가 상당하다.더불어민주당은 미국 등의 사례를 근거로 한국 정유업계에 횡재세 징수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에 밀려 정유업계가 상당한 기부금을 냈다. '준(準) 횡재세'를 냈다는 일각의 평가가 나온다.

SK에너지(기부금 150억원) GS칼텍스(101억원) 현대오일뱅크(100억원) 에쓰오일(10억원) 등 정유업계는 지난 9~10일에 에너지 취약계층을 위한 난방비 지원 명목으로 361억원의 기부금을 냈다. 기부금은 취약계층의 에너지 비용 등을 보조하는 데 쓸 계획이다.

이 같은 기부금은 예년에 비해 큰 폭 불어난 것으로 정유업계의 역대급 실적을 고려해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1~9월 누적으로 SK에너지와 현대오일뱅크는 기부금으로 각각 7억, 23억원을 냈다.

이들 정유사는 "요즘 난방비가 크게 치솟은 만큼 어려운 취약계층을 위해 지원금을 늘렸다"며 기부금 증액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같은 공식답변에도 정유사 안팎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횡재세에 준하는 기부금을 냈다는 평가가 많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야당 정치인들은 연일 "정유업계를 대상으로 횡재세를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난방비 폭탄'의 책임을 무관한 정유업계로 돌리는 일종의 포퓰리즘이라는 평가가 적잖다. 이 같은 십자포화를 피하기 위해 정유업계가 거액의 기부금을 부랴부랴 조성했다는 평가가 많다.

기업이 기부금을 많이 내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기업의 기부는 자발적으로 끌어내야 한다. 외부 압박과 시선에 밀려 기부금을 증액하거나 과도하게 납부하면 각종 부작용이 날 수밖에 없다. 외려 취약계층의 에너지 비용을 불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적이 좋을 때마다 준횡재세를 내야 한다는 우려가 한국 정유사들 사이에 번질 수 있다. 영업이익이 불어날수록 준횡재세 압박이 커지는 만큼 정유업계 투자·이윤추구 심리가 꺾일 수도 있다. 탄소중립 정책으로 벌서 정유업계의 설비투자 속도는 더뎌지고 있다. 앞으로 투자 감축 폭이 한층 커질 전망이다. 정유업계 설비투자가 줄어들수록 국내 기름값은 더 뜀박질할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국내 주유소 사업을 축소하는 한편 휘발유·경유의 수출 비중도 높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