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西風)에 부치는 노래


나를 너의 현악기가 되게 하라, 저 숲처럼
내 잎새가 숲의 잎처럼 떨어진들 어떠랴!
너의 힘찬 격동의 화음이 우리에게서

슬프지만 달콤한 가락을 얻으리라.
너 격렬한 정령이여, 내 영혼이 되어라!
너 내가 되어라, 과감한 자여!

내 죽은 생각을 우주에 흩날리게 하라.
새로운 탄생을 앞당기는 시든 잎사귀처럼!
그리고 이 시를 읊어

꺼지지 않는 화로의 재와 불꽃처럼
내 말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
내 입을 통해 아직 잠자고 있는 대지에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


* 퍼시 비시 셸리(1792~1822) : 영국 낭만주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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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

어느 날 모바일 대화방에 한 친구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시인과 걸인에 관한 이야기였죠. 내용은 이렇습니다.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 모스크바 광장을 지나다가 시각장애 거지를 발견했습니다.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는 거지는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한푼 줍쇼” 하며 애걸했죠. 그러나 행인들은 종종걸음만 쳤습니다. 한참 지켜보던 푸시킨이 다가가 말했습니다. “나도 가난해서 돈이 없소만, 글 몇 자를 써서 주겠소.”

“대체 뭐라고 써주신 거죠?”

며칠 후, 친구와 함께 그곳을 지나는 푸시킨에게 거지가 불쑥 손을 내밀었습니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며칠 전 그분이군요. 그날부터 깡통에 돈이 수북해졌습니다. 대체 뭐라고 써주신 건지요?”
푸시킨은 미소를 지었지요.
“별거 아닙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머지않으리’라고 썼습니다.”

그 ‘별거 아닌’ 문구가 바로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 마지막 구절이었죠.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으리’의 ‘오면’을 ‘왔으니’라고 푸시킨이 바꾼 것이었습니다.

이 시를 활용한 푸시킨은 유난히 겨울과 봄, 고난과 희망에 민감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강골 기질로 러시아 황제의 미움을 사 유배와 검열에 시달렸으니까 더욱 그랬죠. 그는 지금의 슬픔을 이겨내면 반드시 기쁨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그의 시 기억나시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오늘 읽은 셸리의 시에도 슬픔과 노여움, 겨울과 봄, 과거와 미래가 겹쳐 있군요. 제가 소개한 부분은 전체 5부 중 마지막 5부인데, 서풍이 1부에서는 가을의 바람이었다가 5부에서는 봄을 품은 바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서풍은 부드러운 바람이지만, 문학에서는 변화와 자유의 상징으로도 쓰이지요. 평론가들이 사회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시인 셸리의 이 시에 새로운 세계를 꿈꾼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본 게 이런 까닭입니다.

뉴욕 걸인의 팻말도 글귀만 바꿨는데

시인과 걸인, 겨울과 봄 얘기 가운데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일화도 생각나는군요. 1920년대 뉴욕의 한 시각장애인이 ‘저는 앞을 못 봅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앉아 있었죠. 행인들은 무심코 지나갔습니다. 그때 누군가 팻말의 글귀를 바꿔놓고 사라졌지요.

‘봄이 오고 있지만 저는 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투어 적선했습니다. 팻말의 문구를 바꿔 준 사람은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었답니다. 그는 평소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상상력의 힘이 우위에 있다”며 “현실과 상상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라고 강조했지요. 여기에서도 걸인의 ‘보이지 않는 눈’과 행인들의 ‘보이는 봄’을 상상과 은유의 다리로 절묘하게 연결했군요.

겨울 막바지, 모두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몸으로 겪는 칼바람과 폭설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마음의 추위와 가난이지요. 어느 때보다 훈훈한 위로가 필요한 시절입니다. 요즘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하지요. 그래도 따뜻한 손길로 희망의 등불을 건네는 이웃들이 있는 한 세상은 살 만합니다. 지금 어디선가 눈 속에서 싹을 준비하는 얼음새꽃의 잔뿌리가 꿈틀거리는 듯하죠. 우리에게도 봄이 머지않았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