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의 '올림픽 1988'. 소마미술관 제공
문신의 '올림픽 1988'. 소마미술관 제공
"세계 72개국, 191명 조각가 중 최고 명작입니다!"

1988년 9월 미국 방송사 NBC는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에 세워진 한 조각상을 카메라에 담으며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정부는 역사적인 '88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들에게 올림픽공원을 빛낼 조각상을 의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작품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은 건 한국의 조각가 문신(文信·1923~1995)이 만든 '올림픽 1988'이었다. 미디어뿐 아니라 해외 평론가, 미술관장 등 업계 사람들까지 '대단하다'고 입을 모은 작품이다. 다른 작품을 '압살'한 탓에 기분이 상한 프랑스 대표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가 개막식 행사에 불참한 건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조각가들의 칭송과 질투를 한 몸에 받은 올림픽 1988은 아직도 올림픽 조각공원에 남아있다. 한성백제역 2번 출구 근처 남4문에 있는 높이 25m, 무게 54t의 거대한 조각상이 바로 그것이다. 약간씩 어긋나게 겹쳐진 스테인리스 스틸 반구(半球) 55개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오른다. 워낙 크고 무거워서 장정 30~40명이 달라붙어 작품을 만드는 데만 100여일이 걸렸다고 한다.

왜 이 거대한 조각은 그렇게도 많은 사람한테 칭송을 받았을까. 단순히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 평론가인 피에르 레스타이는 그 원인을 "우주와 생명의 음률을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충정로 프레이저플레이스 앞에 있는 문신의 '화(和)'.
충정로 프레이저플레이스 앞에 있는 문신의 '화(和)'.
문신의 작품은 대부분 좌우가 똑같다. 그는 대칭성(symmetry·시메트리)이야말로 자연과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조각에 담고자 했다.

올림픽 1988에서도 대칭성이 돋보인다. 묵주처럼 이어진 거대한 두 줄의 기둥이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며 용처럼 솟구친다. 그 주위를 4분의 1씩 잘려나간 구 4개가 감싸고 있다. 완벽히 이뤄진 균형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완벽한 대칭은 '남북한 화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올림픽이란 국가적 경사를 맞이해 남북한이 화합하면서 통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그에게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남한과 북한이었던 셈이다.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문신의 조각. 문신탄생100주년사업 제공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문신의 조각. 문신탄생100주년사업 제공
이렇게 '한국 조각의 자존심'을 세워준 작품은 하마터면 탄생하지 못할 뻔하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가 세계적 조각가인 문신을 끈질기게 귀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문신은 196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조각을 배웠다. 독창적인 스타일로 미술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자,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귀화를 제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문신과 같은 마산 출신인 청와대 경호실장을 파리로 보냈다. 경호실장은 문신에게 고국으로 돌아오라고 부탁했고, 언제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던 문신은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국격을 한층 높인 올림픽 1988은 문신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문신의 작품은 의외로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서울대법원, 충정로 프레이저플레이스, 코엑스, 창원 한국은행, 포항역 등 전국 곳곳에 설치돼있다.

대칭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보면 가까이 다가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보자. 혹시 모른다. 조각 거장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꼭 미술관에 가야만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출근길에 만나는 조형물, 업무차 들른 호텔에 걸린 그림, 아이 손을 잡고 찾은 백화점에 놓인 조각 중에는 유명 미술관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큼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걷다가 예술’은 이렇게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갑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기사를 놓치지 않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