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해마다 되풀이되는 '반도체 인력난' 경고
“이대로는 정말 큰일 납니다.”

김기남 삼성전자 SAIT(옛 종합기술원) 회장과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부회장은 지난 15일 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반도체 인력난’을 우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 회장은 “인력 문제는 한국 반도체의 가장 큰 리스크”라고 했다. 이들의 발언이 새로운 건 아니다. 지난해 6월 초대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장인 ‘반도체 원로’ 김광교 씨를 만났을 때 그도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면 죽습니다.”

1년 가까이 흘렀지만 인력난에 시달리는 반도체업계의 상황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고 업계는 아우성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구개발(R&D) 인력 쟁탈전이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작년부터 2031년까지 부족한 국내 반도체 학·석·박사 인력은 5만4000여 명으로 예상된다.

박 부회장은 “마이크론이 우수 인력을 키워놓으면 인텔이 데려가고, 마이크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력을 뽑아간다”고 했다. 이 상황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데이터 생산, 저장,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반도체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이 ‘낯설지 않다’는 점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업계에선 틈날 때마다 국가 차원의 전략적인 인력 육성을 호소하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크지 않은 분위기다. 김광교 전 연구소장은 “현역으로 활동하던 30~40년 전보다 상황이 더 열악한 것 같다”며 “미국, 중국, 대만 정부는 뛰는데 한국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부터 2026년까지 105억달러(약 13조4800억원)를 투입해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기로 했다. 대만도 지난해 매년 1만 명의 신규 반도체 인재 확보 전략을 수립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인력 유치에 나서고 있다.

국내에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기업이 주요 대학과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며 대응 중이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게 업계 토로다. 김 회장은 “삼성이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들어봐도 잘 안된다”며 “인력 육성은 기업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겠다는 학생 자체가 부족하다.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올해 1차 합격자 전원이 등록하지 않아 최근 모집 정원(10명)을 넘어서는 추가 합격자(11명)를 발표했다.

“반도체 인력 육성을 위해 정부, 기업, 대학이 더 깊게 고민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여도 모자랄 때”라는 업계 원로의 경고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