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특집] 차창밖 돈때문에 애걸하는 엄마 모습…소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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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훈육 듣지 않는다…당신의 삶 보고 배울 뿐
인터뷰이 20명 살펴보니…경제적 고난 등이 자극제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 응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부모의 경제적 고난에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사업에 실패해 가정경제가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척한테 등록금을 받아와야 하고, 20세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대학 시절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이들은 또 부모님의 직접적인 훈육보다는 부모의 말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고, 배우고, 다짐했다.
채무 문제 때문에 누군가한테 하소연하고 쩔쩔매는 부모님, 보육원에서 헌신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 논밭에서 새까맣게 얼굴 그을려가면서 일하는 어머니, 말없이 정직성을 실천하는 아버지 등을 보면서 자녀들은 삶의 자세를 배우고, 삶의 방향을 정한다.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한 [삶]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20명이었다.
이들은 인터뷰 순서대로 ▲국민 의사 이시형 ▲전 민노당 대표 권영길 ▲고전 평론가 고미숙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탁구 감독 현정화 ▲40년 현역 기자 조갑제 ▲스타강사 김미경 ▲탈북 국회의원 태영호 ▲광운대 교수 진중권 ▲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 김종인 ▲전 프로골프 선수 박세리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전 민주당 의원 금태섭 ▲주사파 대부 김영환 ▲시인 정호승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변호사 김재련 ▲전태일 열사 여동생 전순옥 ▲영원한 재야 장기표 ▲범죄심리 전문가 이수정 ▲시인 나희덕이다.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본인들 자신도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삶이 완전히 기대에 충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되는 삶은 아니라는 게 그들 스스로의 대체적인 평가다.
'영원한 재야 운동권' 장기표(77)는 대학 시절 유명한 과외교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해왔기에 경험이 적지 않게 쌓인 결과였다.
대학 시절의 그는 부잣집 중고생이 여름방학 때 동해안으로 해수욕을 가면 함께 따라가서 방을 얻어놓고는 밤에 과외를 하기도 했다.
과외 아르바이트에 뛰어든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집은 남한테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가난이 심했다"면서 "형님들이 산에서 나무를 하곤 했는데, 발뒤꿈치가 갈라져도 약이 없어서 그 상처를 뜨거운 촛농으로 소독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삼촌과 형제들이 결혼할 때마다 논을 1∼2마지기씩 떼어주다 보니 더욱 가난해졌다"면서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더는 살 수가 없어 김해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김해에서 형과 형수는 작은 방앗간을 운영했다.
장기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원동기 작동하는 일을 맡았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방앗간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하다 보니 먼지 때문에 폐결핵을 앓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성장한 뒤 가슴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고는 알았다.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이고 괄괄한 성격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유능하지 않았다.
장기표의 형제 4남 2녀 중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다.
다른 형제들은 학교에 다닐 경제적 형편이 안됐다.
일찌감치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 시절에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9년간의 감옥생활과 12년간의 수배 생활을 버티게 해줬던 것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였다고 했다.
그는 현재 신문명정책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진중권(60) 광운대 교수도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여서 오랫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봉급을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이었고 액수도 일반 목사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연탄가스 중독 후유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1년 만이었다.
그 이후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다.
사범학교에서 풍금을 배웠던 실력으로 피아노 레슨을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진중권은 자유방임 상태에서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인데다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강한 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담배를 피우고, 싸움하다 정학을 세 번이나 맞았다.
자동차 면허는 없지만, 경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으나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과감히 버렸다.
집단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를 싫어하는 그는 조국 사태 당시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정치평론가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진중권은 "정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이 못 된다"면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고 의무를 잘 지키지 못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권영길(81)은 여전히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다.
그의 삶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망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북으로 철수할 때 지리산에 숨어 들어갔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빨치산이 되기 전에는 마을 이장을 했고 초등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권영길은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했다.
주변 마을 할머니들이 초등학교 시절 때 자신을 만나면 "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다, 생각 바르고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칭찬했다고 했다.
어떤 마을 분은 "권영길의 아버지가 '골고루 평등한 세상'을 만들다가 죽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동유럽과 소련이 몰락하고 북한 경제가 추락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적 대안으로 실패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됐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지적 능력의 부족, 협소한 시야, 현실감각 결여 등으로 인해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소외된 자,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열정은 갖고 있었다.
권영길 역시 고교 시절에 "아버지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정부가 펴낸 사회주의 비판 서적을 탐독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해했다.
그는 그때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 시절에도 권영길은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는 "서울대 농대에 들어갔지만, 돈이 없어서 기숙사에서 나와야 했다"면서 "친구와 자취를 했는데, 난방은 물론이고 먹거리도 없어 굶다시피 했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결국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는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69)은 오빠와 어머니 이소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와 오빠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배우고 실천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전순옥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이소선은 연구대상이 될만하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에 잡혀가 진술서에 존경하는 사람을 쓰라는 칸에 항상 어머니라고 적었다"면서 "경찰들은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다시 쓰라고 했지만, 나는 고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소선은 시위에 참여하다 390차례나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노동자 권익,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장례식을 빨리 치르라고 종용하는 노동청장의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시위하다 잡혀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면서 경찰서에 찾아가 집기를 때려 부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 팔아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 책을 사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자신의 결혼 전 처녀 시절 사랑 이야기를 자식들에게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오빠에 대한 전순옥의 생각은 존경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전순옥은 "어떻게 한 인간이 그 정도의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중학교 때 오빠 방을 청소하다 동대문 평화시장의 이야기를 써놓은 일기장을 봤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 오후 내내 울었다"고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옷 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버스 탈 돈으로 13∼14세의 어린 시다(보조원)에게 점심용으로 풀빵을 사준 뒤 도봉구 쌍문동 집까지 30리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다.
전태일은 근로조건이 개선되지 않자 1970년 11월 13일 분신했다.
오빠가 분신한 이후 전순옥과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 구절로 유명한 시인 정호승(73)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지금까지 1천1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는 삶 자체가 고통이라면서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다소 염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 가난에서 비롯됐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40세가 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버지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운수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살고 있던 기와집을 팔고 그 옆 마당에 있던 닭장을 허물고는 간이 집을 지어 살아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고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기성회비는 반에서 제일 늦게 냈다.
그런 이유로 교무실에 끌려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출석부로 한 번씩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곤 했다.
더는 대구에서 살 수 없었던 부모님은 빚잔치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친척 집에 머물면서 다른 집에 가서 파출부 일을 하기도 했다.
누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나가서 돈을 보내왔다.
가난은 그를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적어도 자녀의 학자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시로는 밥벌이할 수 없으니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시를 쓰라고 그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권한다.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푸른 밤'의 지은이는 나희덕(57)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고단한 삶을 살아왔고, 그것은 그의 문학적 바탕이 됐다.
나희덕은 보육원에서 자랐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보육원 총무여서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원내의 큰 식당에서 같이 먹고,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놀았다.
학교에도 함께 오갔다.
그의 보육원 생활은 20세가 되기 전까지 지속됐다.
그는 보육원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부모가 있는 아이여서 원아들한테 소외됐고, 보육원 밖에서는 고아로 여겨졌다.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은 그렇게 길러졌다.
나희덕의 어린 시절은 생활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어려웠다.
그는 "어머니의 급여는 일반적인 사회(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면서 "아버지는 텃밭을 일구고 염소와 닭을 키웠지만, 가정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됐다"고 했다.
나희덕은 대학 시절 대여섯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중고생을 가르치는 과외도 했고, 유치원 미술 교사도 했다.
잡지사 교열, 피아노 레슨도 했다.
제과 회사에서 과자를 먹어보고 이름을 짓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희덕은 부모님의 신앙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존경했다.
나희덕은 24세의 나이에 결혼했으나 34년간 채무를 갚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는 아예 채무와 이자의 규모를 계산하지 않는 방법으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채무를 모두 상환한 것은 작년이었다.
그는 "시를 쓰는 일이 일상의 남루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려줬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대를 거쳐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비야(64)에게는 한국이 좁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던 1993년부터 6년간 오지 여행을 한 뒤 2001년부터 20여 년간 국제 구호 활동을 했다.
그의 긴급구호 삶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과 그에 따른 가난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KBS에 근무했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퇴근길에 길거리의 고아를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입혔다.
한비야는 "아버지는 북한에 살다가 월남하신 분인데, 부산에서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고아 거지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비야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의 친척으로부터 학교 등록금을 얻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아닌 친척한테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사정 등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채 고졸의 학력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약자에 대한 사회의 폭력을 그대로 경험했다.
사람들은 그가 고졸이라는 이유로 "네까짓 게 뭘 아느냐", "얼굴 반질반질하게 재취 자리나 가라"는 등의 막말을 했다.
월급을 주지 않는 일도 많았다.
이런 경험은 한비야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마음의 바탕이 됐다.
김재련(50)은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변호사다.
그는 "노란 머리, 자살시켜야 한다"는 등의 욕설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고, 다른 사건 변론을 위해 법원에 갔을 때는 중년여성들로부터 "미친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여성계 일부는 김재련을 비난했고 박원순 지지자들은 '기획 미투'라며 공격했다.
그러나 흔들림이 없었다.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 단련됐고,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김재련은 "어머니의 사랑이 내 마음의 갑옷"이라고 했다.
그가 어렸던 시절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다.
호인 스타일이어서 노는 것과 술을 좋아했고, 고스톱도 즐겼다.
농지가 없어서 어머니의 친정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밥하는 법을 배웠고, 태풍에 벼들이 쓰러지면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와 같이 벼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기도 했다.
김재련은 "어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낸 적이 없다"면서 "학창 시절 내가 밤늦게 공부를 할 때 어머니는 '혼자 공부하는데 동무를 해주겠다'면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내 방에 와서 졸기도 하셨다"고 했다.
김재련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람이 공부만 잘해서는 소용없다.
밥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청소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먼저 보면 주울 줄도 알아야 하고, 동네 어른들을 보면 인사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환(59)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젊은 시절 남한 주사파의 대부였다.
대학생 신분으로 북한에 밀입북해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났고, 그전에 주사파 학습서인 '강철서신'을 썼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북한의 민주화 혁명에 투신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중단하고 북한 민주화 혁명을 위해 활동하다 중국 공안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영환은 "남한에서 학생운동과 지하운동을 할 때는 사형당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맑은 웃음의 그가 평생을 '혁명'에 투신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영환의 아버지는 전화매매 사업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부자였기에 경제 사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김영환 부모가 다른 부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식의 학생운동을 막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영환은 "부모님은 학생운동 하는 것을 말리거나 적극적으로 비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이는 평소에 부모님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직성을 매우 중시했던 아버지는 평소에는 체제를 비난하다가 자식에게 위험한 일이 됐을 때 말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영환은 부모님의 이런 정직성 영향 때문인지 태어나서 한 번도 욕해본 적이 없고,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63)은 광부의 딸이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탄광 사택에서 자랐다.
그는 "아버지가 광부여서 생활이 유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은 나보다 극빈자들이었다"면서 "그들은 도시락을 못 싸 오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프다고 했다.
고미숙은 단칸방에서 할머니, 삼촌, 고모 등 아홉 식구가 살다 보니 가족 간에 생기는 불화도 목격했다.
어머니한테는 쓰라린 시집살이였다.
고미숙은 "가난이 괴롭다기보다는 가족관계에서 오는 불화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서 "어린 시절에도 막연히 돈이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은 그가 근원적으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을 탐구하는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 자체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서 "끊임없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체의 맹목성, 그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이 붓다, 공자, 노자 등 동양 현자들이 고민했던 대목"이라고 했다.
그는 "맹목과 허무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집착하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사회 탁구 감독인 현정화(53)도 가난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느닷없이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고,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어머니로서는 어떻게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현정화는 "어머니가 아프실 때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누워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서 "이런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성실한 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정화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었다고 했다.
가난은 현정화의 승부 근성을 키웠다.
현정화는 "탁구에서 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어했다"면서 "한 게임도 지기 싫었다"고 말했다.
부산 계성여자상업고교 1학년 때인 1985년 국가대표가 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선배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북한의 리분희 선수 등과 함께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해 여자 단체전 우승을 거뒀다.
프로골프 선수였던 박세리(45)에게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 사업의 위기가 자극제가 됐다.
아버지의 사업은 박세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가 골프를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박세리의 아버지 사업이 잘될 때는 돈을 빌려달라는 것을 비롯해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통이 큰 스타일이어서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다.
어느 날 박세리는 아버지의 승용차 안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장면이 보였다.
상대방은 돈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박세리로서는 삶의 냉정하고 슬픈 장면을 그렇게 보고 말았다.
박세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다"면서 "그때 운동으로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운동 자체에도 영향을 줬다.
박세리는 "당시 골프용품은 얻어서 사용하기도 했다"면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지방 곳곳에 다녀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모텔 수준도 안 되는 숙소에서 자기도 했다"고 전했다.
박세리는 평소에 부모님이 겸손을 강조한 것도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의 말씀을 실천하다 보니 내가 더 조심하게 되고, 겸손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하종강(68)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40년간 노동 상담 일을 해왔다.
비닐하우스에 노조 사무실을 차려놓은 소기업 노조가 부르면 새벽에 일어나 달려가는 사람이다.
돈과 명예가 따르지 않고, 권력과도 상관없는 일을 그렇게 묵묵히 해온 것은 젊은 시절부터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생 시절 하종강은 사흘간 방에서 나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학생운동과 관련한 결단이 필요했는데. 너무 고민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즈음에 어머니가 그가 없는 자리에서 중학생 여동생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다고 한다.
"네 오빠가 하는 고민의 내용을 나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
가족으로서 그렇게 이해하자. 그동안 엄마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하종강은 그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이제 자녀들에게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작은 짐승도 할 수 있으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하종강의 자녀들에게 이런 말은 필요없을 수도 있다.
하종강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는지 자녀들은 매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정(59) 경기대 교수는 범죄심리 전문가이지만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많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과 관련 정책 제안을 많이 했고 수사에도 직접 참여했다.
스토킹 처벌법 입법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여성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집안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수정은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 태어나서 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족들은 모두 그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의 연년생 남동생 중심으로 집안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호칭이 붙었다.
조부모, 삼촌, 고모 등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어머니는 심한 시집살이를 했다.
이수정은 여성이 겪는 고통을 목격했다.
본인도 결혼할 때부터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수정은 연세대 심리학과 석사학위를 마치고 강사 제안을 받았는데, 결혼 직전의 남편이 반대했다.
이수정은 며칠간의 단식투쟁으로 자기 뜻을 관철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해야 했다"면서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최대 역경"이라면서 "나는 여성이기에 중간에 학업도, 경력도 중단됐다"고 했다.
김종인(82)은 여야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정치적 철새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 어려움에 빠진 정당을 도와줬다고 했다.
그는 "내가 특정 정당에 가겠다고 한 적이 없고, 모든 경우가 정당이 오라고 해서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한테 종속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간에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스타일이다.
김종인은 "나는 소신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성격은 할아버지였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삶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김종인은 "할아버지는 자신의 인생 진로를 정해놓고, 그대로 사셨던 분"이라면서 "일본 강점기에 변호사로 일했지만, 독립운동가를 도와주느라 남아있는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김종인의 아버지는 사법고시 패스 후 법관을 지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는 사업을 하는 백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녔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강대 교수, 복지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비례대표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스타강사 김미경(57)은 충북 증평읍의 양장점 딸이었다.
그는 사업수완과 생활력에서는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기성복의 등장으로 양장점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친구들을 관광업체에 알선해주면서 사례비도 받고, 단체복으로 옷을 주문받았다.
그의 도전 정신도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는 10%의 가능성만 보여도 도전한다고 했다.
연세대 작곡과 졸업 후 피아노학원 원장이었던 김미경은 기업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했고, 이제는 유튜버, 평생교육 온라인 플랫폼인 MKYU 학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미경의 말하는 능력을 키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돼지 농장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김미경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다.
아버지는 "네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고 한다.
김미경이 나이가 들어서도 집에 전화하면 아버지와 세시간씩 통화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여성스러운 성격이었고, 이는 그의 말솜씨 향상에 도움을 줬다.
그는 '언니의 독설', '김미경의 리부트'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고, 최근 내놓은 '김미경의 마흔 수업'도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연합뉴스
인터뷰이 20명 살펴보니…경제적 고난 등이 자극제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 응했던 이들의 상당수는 부모의 경제적 고난에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사업에 실패해 가정경제가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척한테 등록금을 받아와야 하고, 20세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대학 시절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이들은 또 부모님의 직접적인 훈육보다는 부모의 말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고, 배우고, 다짐했다.
채무 문제 때문에 누군가한테 하소연하고 쩔쩔매는 부모님, 보육원에서 헌신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 논밭에서 새까맣게 얼굴 그을려가면서 일하는 어머니, 말없이 정직성을 실천하는 아버지 등을 보면서 자녀들은 삶의 자세를 배우고, 삶의 방향을 정한다.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한 [삶]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20명이었다.
이들은 인터뷰 순서대로 ▲국민 의사 이시형 ▲전 민노당 대표 권영길 ▲고전 평론가 고미숙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탁구 감독 현정화 ▲40년 현역 기자 조갑제 ▲스타강사 김미경 ▲탈북 국회의원 태영호 ▲광운대 교수 진중권 ▲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장 김종인 ▲전 프로골프 선수 박세리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전 민주당 의원 금태섭 ▲주사파 대부 김영환 ▲시인 정호승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변호사 김재련 ▲전태일 열사 여동생 전순옥 ▲영원한 재야 장기표 ▲범죄심리 전문가 이수정 ▲시인 나희덕이다.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본인들 자신도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삶이 완전히 기대에 충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되는 삶은 아니라는 게 그들 스스로의 대체적인 평가다.
'영원한 재야 운동권' 장기표(77)는 대학 시절 유명한 과외교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해왔기에 경험이 적지 않게 쌓인 결과였다.
대학 시절의 그는 부잣집 중고생이 여름방학 때 동해안으로 해수욕을 가면 함께 따라가서 방을 얻어놓고는 밤에 과외를 하기도 했다.
과외 아르바이트에 뛰어든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집은 남한테 말하기 창피할 정도로 가난이 심했다"면서 "형님들이 산에서 나무를 하곤 했는데, 발뒤꿈치가 갈라져도 약이 없어서 그 상처를 뜨거운 촛농으로 소독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삼촌과 형제들이 결혼할 때마다 논을 1∼2마지기씩 떼어주다 보니 더욱 가난해졌다"면서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더는 살 수가 없어 김해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김해에서 형과 형수는 작은 방앗간을 운영했다.
장기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원동기 작동하는 일을 맡았기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방앗간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하다 보니 먼지 때문에 폐결핵을 앓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성장한 뒤 가슴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고는 알았다.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이고 괄괄한 성격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유능하지 않았다.
장기표의 형제 4남 2녀 중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본인밖에 없었다.
다른 형제들은 학교에 다닐 경제적 형편이 안됐다.
일찌감치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 시절에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9년간의 감옥생활과 12년간의 수배 생활을 버티게 해줬던 것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였다고 했다.
그는 현재 신문명정책연구원장으로 일하면서 여전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진중권(60) 광운대 교수도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여서 오랫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봉급을 받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이었고 액수도 일반 목사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연탄가스 중독 후유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1년 만이었다.
그 이후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다.
사범학교에서 풍금을 배웠던 실력으로 피아노 레슨을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진중권은 자유방임 상태에서 자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인데다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강한 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담배를 피우고, 싸움하다 정학을 세 번이나 맞았다.
자동차 면허는 없지만, 경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으나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과감히 버렸다.
집단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를 싫어하는 그는 조국 사태 당시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정치평론가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진중권은 "정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이 못 된다"면서 "나는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고 의무를 잘 지키지 못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권영길(81)은 여전히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다.
그의 삶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망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북으로 철수할 때 지리산에 숨어 들어갔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빨치산이 되기 전에는 마을 이장을 했고 초등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권영길은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했다.
주변 마을 할머니들이 초등학교 시절 때 자신을 만나면 "너의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한 분이었다, 생각 바르고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다"고 칭찬했다고 했다.
어떤 마을 분은 "권영길의 아버지가 '골고루 평등한 세상'을 만들다가 죽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동유럽과 소련이 몰락하고 북한 경제가 추락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적 대안으로 실패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됐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지적 능력의 부족, 협소한 시야, 현실감각 결여 등으로 인해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소외된 자,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열정은 갖고 있었다.
권영길 역시 고교 시절에 "아버지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정부가 펴낸 사회주의 비판 서적을 탐독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해했다.
그는 그때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 시절에도 권영길은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는 "서울대 농대에 들어갔지만, 돈이 없어서 기숙사에서 나와야 했다"면서 "친구와 자취를 했는데, 난방은 물론이고 먹거리도 없어 굶다시피 했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결국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는 사단법인 '권영길과 나아지는 살림살이'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69)은 오빠와 어머니 이소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와 오빠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배우고 실천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전순옥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의 이소선은 연구대상이 될만하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에 잡혀가 진술서에 존경하는 사람을 쓰라는 칸에 항상 어머니라고 적었다"면서 "경찰들은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다시 쓰라고 했지만, 나는 고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소선은 시위에 참여하다 390차례나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노동자 권익,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장례식을 빨리 치르라고 종용하는 노동청장의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시위하다 잡혀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면서 경찰서에 찾아가 집기를 때려 부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 팔아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 책을 사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자신의 결혼 전 처녀 시절 사랑 이야기를 자식들에게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오빠에 대한 전순옥의 생각은 존경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전순옥은 "어떻게 한 인간이 그 정도의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중학교 때 오빠 방을 청소하다 동대문 평화시장의 이야기를 써놓은 일기장을 봤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서 오후 내내 울었다"고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옷 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버스 탈 돈으로 13∼14세의 어린 시다(보조원)에게 점심용으로 풀빵을 사준 뒤 도봉구 쌍문동 집까지 30리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다.
전태일은 근로조건이 개선되지 않자 1970년 11월 13일 분신했다.
오빠가 분신한 이후 전순옥과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 구절로 유명한 시인 정호승(73)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지금까지 1천1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는 삶 자체가 고통이라면서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다소 염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 가난에서 비롯됐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40세가 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버지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운수사업에 뛰어들었으나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살고 있던 기와집을 팔고 그 옆 마당에 있던 닭장을 허물고는 간이 집을 지어 살아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고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기성회비는 반에서 제일 늦게 냈다.
그런 이유로 교무실에 끌려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출석부로 한 번씩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곤 했다.
더는 대구에서 살 수 없었던 부모님은 빚잔치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친척 집에 머물면서 다른 집에 가서 파출부 일을 하기도 했다.
누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나가서 돈을 보내왔다.
가난은 그를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적어도 자녀의 학자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시로는 밥벌이할 수 없으니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시를 쓰라고 그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권한다.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푸른 밤'의 지은이는 나희덕(57)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고단한 삶을 살아왔고, 그것은 그의 문학적 바탕이 됐다.
나희덕은 보육원에서 자랐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보육원 총무여서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원내의 큰 식당에서 같이 먹고,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놀았다.
학교에도 함께 오갔다.
그의 보육원 생활은 20세가 되기 전까지 지속됐다.
그는 보육원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부모가 있는 아이여서 원아들한테 소외됐고, 보육원 밖에서는 고아로 여겨졌다.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끼지 못하는 주변인이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은 그렇게 길러졌다.
나희덕의 어린 시절은 생활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어려웠다.
그는 "어머니의 급여는 일반적인 사회(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면서 "아버지는 텃밭을 일구고 염소와 닭을 키웠지만, 가정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됐다"고 했다.
나희덕은 대학 시절 대여섯 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중고생을 가르치는 과외도 했고, 유치원 미술 교사도 했다.
잡지사 교열, 피아노 레슨도 했다.
제과 회사에서 과자를 먹어보고 이름을 짓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희덕은 부모님의 신앙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존경했다.
나희덕은 24세의 나이에 결혼했으나 34년간 채무를 갚느라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는 아예 채무와 이자의 규모를 계산하지 않는 방법으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채무를 모두 상환한 것은 작년이었다.
그는 "시를 쓰는 일이 일상의 남루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려줬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대를 거쳐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비야(64)에게는 한국이 좁다.
그는 30대 초반이었던 1993년부터 6년간 오지 여행을 한 뒤 2001년부터 20여 년간 국제 구호 활동을 했다.
그의 긴급구호 삶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과 그에 따른 가난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KBS에 근무했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퇴근길에 길거리의 고아를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입혔다.
한비야는 "아버지는 북한에 살다가 월남하신 분인데, 부산에서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고아 거지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비야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의 친척으로부터 학교 등록금을 얻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아닌 친척한테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민망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사정 등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채 고졸의 학력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약자에 대한 사회의 폭력을 그대로 경험했다.
사람들은 그가 고졸이라는 이유로 "네까짓 게 뭘 아느냐", "얼굴 반질반질하게 재취 자리나 가라"는 등의 막말을 했다.
월급을 주지 않는 일도 많았다.
이런 경험은 한비야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마음의 바탕이 됐다.
김재련(50)은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변호사다.
그는 "노란 머리, 자살시켜야 한다"는 등의 욕설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고, 다른 사건 변론을 위해 법원에 갔을 때는 중년여성들로부터 "미친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여성계 일부는 김재련을 비난했고 박원순 지지자들은 '기획 미투'라며 공격했다.
그러나 흔들림이 없었다.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 단련됐고,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김재련은 "어머니의 사랑이 내 마음의 갑옷"이라고 했다.
그가 어렸던 시절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다.
호인 스타일이어서 노는 것과 술을 좋아했고, 고스톱도 즐겼다.
농지가 없어서 어머니의 친정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밥하는 법을 배웠고, 태풍에 벼들이 쓰러지면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와 같이 벼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기도 했다.
김재련은 "어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낸 적이 없다"면서 "학창 시절 내가 밤늦게 공부를 할 때 어머니는 '혼자 공부하는데 동무를 해주겠다'면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내 방에 와서 졸기도 하셨다"고 했다.
김재련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람이 공부만 잘해서는 소용없다.
밥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청소도 할 줄 알아야 하고,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먼저 보면 주울 줄도 알아야 하고, 동네 어른들을 보면 인사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환(59)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젊은 시절 남한 주사파의 대부였다.
대학생 신분으로 북한에 밀입북해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났고, 그전에 주사파 학습서인 '강철서신'을 썼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북한의 민주화 혁명에 투신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중단하고 북한 민주화 혁명을 위해 활동하다 중국 공안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영환은 "남한에서 학생운동과 지하운동을 할 때는 사형당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나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맑은 웃음의 그가 평생을 '혁명'에 투신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영환의 아버지는 전화매매 사업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부자였기에 경제 사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김영환 부모가 다른 부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식의 학생운동을 막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영환은 "부모님은 학생운동 하는 것을 말리거나 적극적으로 비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이는 평소에 부모님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직성을 매우 중시했던 아버지는 평소에는 체제를 비난하다가 자식에게 위험한 일이 됐을 때 말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영환은 부모님의 이런 정직성 영향 때문인지 태어나서 한 번도 욕해본 적이 없고,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63)은 광부의 딸이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탄광 사택에서 자랐다.
그는 "아버지가 광부여서 생활이 유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은 나보다 극빈자들이었다"면서 "그들은 도시락을 못 싸 오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프다고 했다.
고미숙은 단칸방에서 할머니, 삼촌, 고모 등 아홉 식구가 살다 보니 가족 간에 생기는 불화도 목격했다.
어머니한테는 쓰라린 시집살이였다.
고미숙은 "가난이 괴롭다기보다는 가족관계에서 오는 불화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서 "어린 시절에도 막연히 돈이 있다고 행복해지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이런 경험은 그가 근원적으로 인간의 불행과 행복을 탐구하는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삶 자체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서 "끊임없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생명체의 맹목성, 그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이 붓다, 공자, 노자 등 동양 현자들이 고민했던 대목"이라고 했다.
그는 "맹목과 허무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집착하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사회 탁구 감독인 현정화(53)도 가난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느닷없이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고,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어머니로서는 어떻게든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현정화는 "어머니가 아프실 때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누워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서 "이런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성실한 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정화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었다고 했다.
가난은 현정화의 승부 근성을 키웠다.
현정화는 "탁구에서 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어했다"면서 "한 게임도 지기 싫었다"고 말했다.
부산 계성여자상업고교 1학년 때인 1985년 국가대표가 된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선배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북한의 리분희 선수 등과 함께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해 여자 단체전 우승을 거뒀다.
프로골프 선수였던 박세리(45)에게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 사업의 위기가 자극제가 됐다.
아버지의 사업은 박세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가 골프를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박세리의 아버지 사업이 잘될 때는 돈을 빌려달라는 것을 비롯해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통이 큰 스타일이어서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들은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했다.
어느 날 박세리는 아버지의 승용차 안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떤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장면이 보였다.
상대방은 돈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박세리로서는 삶의 냉정하고 슬픈 장면을 그렇게 보고 말았다.
박세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다"면서 "그때 운동으로 성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운동 자체에도 영향을 줬다.
박세리는 "당시 골프용품은 얻어서 사용하기도 했다"면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지방 곳곳에 다녀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모텔 수준도 안 되는 숙소에서 자기도 했다"고 전했다.
박세리는 평소에 부모님이 겸손을 강조한 것도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의 말씀을 실천하다 보니 내가 더 조심하게 되고, 겸손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하종강(68)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40년간 노동 상담 일을 해왔다.
비닐하우스에 노조 사무실을 차려놓은 소기업 노조가 부르면 새벽에 일어나 달려가는 사람이다.
돈과 명예가 따르지 않고, 권력과도 상관없는 일을 그렇게 묵묵히 해온 것은 젊은 시절부터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생 시절 하종강은 사흘간 방에서 나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학생운동과 관련한 결단이 필요했는데. 너무 고민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즈음에 어머니가 그가 없는 자리에서 중학생 여동생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다고 한다.
"네 오빠가 하는 고민의 내용을 나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
가족으로서 그렇게 이해하자. 그동안 엄마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하종강은 그때 어머니가 했던 말을 이제 자녀들에게 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작은 짐승도 할 수 있으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하종강의 자녀들에게 이런 말은 필요없을 수도 있다.
하종강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는지 자녀들은 매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정(59) 경기대 교수는 범죄심리 전문가이지만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많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과 관련 정책 제안을 많이 했고 수사에도 직접 참여했다.
스토킹 처벌법 입법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여성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집안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수정은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 태어나서 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족들은 모두 그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의 연년생 남동생 중심으로 집안이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호칭이 붙었다.
조부모, 삼촌, 고모 등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어머니는 심한 시집살이를 했다.
이수정은 여성이 겪는 고통을 목격했다.
본인도 결혼할 때부터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수정은 연세대 심리학과 석사학위를 마치고 강사 제안을 받았는데, 결혼 직전의 남편이 반대했다.
이수정은 며칠간의 단식투쟁으로 자기 뜻을 관철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해야 했다"면서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최대 역경"이라면서 "나는 여성이기에 중간에 학업도, 경력도 중단됐다"고 했다.
김종인(82)은 여야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정치적 철새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해 어려움에 빠진 정당을 도와줬다고 했다.
그는 "내가 특정 정당에 가겠다고 한 적이 없고, 모든 경우가 정당이 오라고 해서 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한테 종속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간에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스타일이다.
김종인은 "나는 소신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성격은 할아버지였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삶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김종인은 "할아버지는 자신의 인생 진로를 정해놓고, 그대로 사셨던 분"이라면서 "일본 강점기에 변호사로 일했지만, 독립운동가를 도와주느라 남아있는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김종인의 아버지는 사법고시 패스 후 법관을 지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는 사업을 하는 백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녔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강대 교수, 복지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비례대표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스타강사 김미경(57)은 충북 증평읍의 양장점 딸이었다.
그는 사업수완과 생활력에서는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는 기성복의 등장으로 양장점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친구들을 관광업체에 알선해주면서 사례비도 받고, 단체복으로 옷을 주문받았다.
그의 도전 정신도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는 10%의 가능성만 보여도 도전한다고 했다.
연세대 작곡과 졸업 후 피아노학원 원장이었던 김미경은 기업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했고, 이제는 유튜버, 평생교육 온라인 플랫폼인 MKYU 학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미경의 말하는 능력을 키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돼지 농장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김미경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다.
아버지는 "네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고 한다.
김미경이 나이가 들어서도 집에 전화하면 아버지와 세시간씩 통화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여성스러운 성격이었고, 이는 그의 말솜씨 향상에 도움을 줬다.
그는 '언니의 독설', '김미경의 리부트'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고, 최근 내놓은 '김미경의 마흔 수업'도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