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애나 통매각해 戰費 마련한 나폴레옹…美는 헐값에 영토 두 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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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종횡무진 세계사
(21) 기회 살린 미국, 기회 날린 중국
북미서도 제국 만들려던 나폴레옹
英과의 대결 앞두고 돈 부족 시달려
뉴올리언스 매입 타진 美사절단에
"1500만弗에 루이지애나 다 사라"
의회 건너뛰고 도장 찍은 제퍼슨
초강대국 될 결정적 기회 안 놓쳐
(21) 기회 살린 미국, 기회 날린 중국
북미서도 제국 만들려던 나폴레옹
英과의 대결 앞두고 돈 부족 시달려
뉴올리언스 매입 타진 美사절단에
"1500만弗에 루이지애나 다 사라"
의회 건너뛰고 도장 찍은 제퍼슨
초강대국 될 결정적 기회 안 놓쳐
조선은 나폴레옹을 몰랐지만 나폴레옹은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816년 조선을 방문한 배질 홀이라는 영국인이 있다. 이 사람이 귀국길에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을 찾아간다. 배질 홀은 자신의 경유지였던 조선과 류큐 왕국 그리고 필리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고, 나폴레옹은 그 나라들에 눈까지 반짝이며 흥미를 보인다. 나중에 거기까지 정복하려고? 아니다. 나폴레옹의 정복 유전자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망상 환자는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밖에서도 제국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배질 홀의 여행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양에서 적당한 후보지를 물색 중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절해고도에 고립돼 있지만 그의 마음만은 여전히 유럽의 제왕이었다. 혹시, 진짜로 나폴레옹이 탈출에 성공했더라면 그리고 그가 전진기지로 선택한 곳이 조선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일단 우리를 한번 신나게 밟아준 뒤 차근차근 동양의 유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와 일본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양에서는 그 후보가 미정이었지만 북미 대륙에서는 그곳이 루이지애나였다(지명은 루이 14세에게 헌정한 땅이라는 의미).
프렌치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의욕을 꺾은 것은 돈이었다. 영국과의 대결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전쟁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나폴레옹을 찾아온 게 제임스 먼로를 대표로 하는 미국 사절단이다. 중남부 해안가의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고 싶다는 사절단의 말에 나폴레옹은 한술 더 떠 아예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라고 제안한다. 영국은 뉴올리언스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고 프랑스가 막강한 영국 해군으로부터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를 방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욕심부리다 영국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얼마라도 받고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 이익이라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이다.
먼로는 현기증을 느낀다. 펜션을 사러 갔더니 산 전체를 팔겠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매우 저렴하게. 협상 끝에 매입가는 1500만달러로 정해진다. 1평방마일당 18센트로, 주웠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매매 계약은 4월 30일에 체결된다. 프랑스 협상 대표 탈레랑은 자신들이 무슨 미친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먼로에게 말했다. “아주 좋은 물건을 싸게 사셨습니다. 잘 쓰십시오.” 매입 소식은 6월 14일이 돼서야 제퍼슨에게 전해졌다. 미국 영토가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난 사실에 제퍼슨은 당황한다. 의회 승인도 없이 사절단 대표가 영토 변경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은 헌법과도 충돌했다. 그러나 합헌이니 위헌이니 따지는 동안 나폴레옹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몰랐고 고민 끝에 제퍼슨은 의회 비준 절차를 건너뛰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제퍼슨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루이지애나 매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아메리카 유일의 강대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아메리카는 아프리카처럼 유럽 열강의 싸움터가 됐을 것이다. 그 시기 청나라는 할양이니 조차니 하는 말로 영토를 뜯기고 있었다. 제일 웃기는 게 암할(暗割)이다. 비밀리에 분할 양도한다는 뜻으로 사실상 양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기강이 파탄 난 청나라 말기의 황당한 외교 기법이다. 이 덕분에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이 파견한 총독과 청나라 정부가 파견한 장관이 협의해서 공무를 처리했다. 새로운 지식으로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청나라는 1872년 30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보낸다. 기원전 221년 통일 진나라 이후 중국이 외국에서 뭘 배워오라고 유학생을 보낸 것은 209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획은 이랬다. 4년간 10세에서 15세 사이의 영재를 30명씩 보내 15년 뒤 능력이 가장 출중한 시기에 귀국시켜 국가에 봉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이들에게 유학 기간 중 중국 학문을 병행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중국 영재들은 군주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고 오랑캐의 학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유광훈’이라는 책자를 1주일에 한 번씩 읽어야 했다. 책의 7조는 ‘이단을 몰아내고 정학을 숭상한다’이다.
신학문을 배우라고 해 놓고 이단을 몰아내라는 이 난해한 논리를 굳이 해석하자면 배우되 배우지 말고 배웠으되 익히지 말라는 뜻 정도가 되겠다. 청나라 보수파들의 집요한 시비 끝에 유학생 파견 사업은 1881년 중단된다. 10년 공부는 했으니 중국의 개혁을 위해 뭔가를 했을 법도 한데 돌아온 유학생들은 찬밥 신세였고 이 중 많은 수가 청일전쟁을 전후로 일개 사병으로 참전해 허망하게 전사한다. 중국은 그렇게 기회를 날렸고 같은 시기 유럽과 미국에 초장기 사절단을 보내 신문물을 익힌 일본에 동아시아 바다를 넘겨준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나폴레옹은 유럽 밖에서도 제국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배질 홀의 여행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양에서 적당한 후보지를 물색 중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절해고도에 고립돼 있지만 그의 마음만은 여전히 유럽의 제왕이었다. 혹시, 진짜로 나폴레옹이 탈출에 성공했더라면 그리고 그가 전진기지로 선택한 곳이 조선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일단 우리를 한번 신나게 밟아준 뒤 차근차근 동양의 유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와 일본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양에서는 그 후보가 미정이었지만 북미 대륙에서는 그곳이 루이지애나였다(지명은 루이 14세에게 헌정한 땅이라는 의미).
프렌치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려던 나폴레옹의 의욕을 꺾은 것은 돈이었다. 영국과의 대결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전쟁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나폴레옹을 찾아온 게 제임스 먼로를 대표로 하는 미국 사절단이다. 중남부 해안가의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고 싶다는 사절단의 말에 나폴레옹은 한술 더 떠 아예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라고 제안한다. 영국은 뉴올리언스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고 프랑스가 막강한 영국 해군으로부터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를 방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욕심부리다 영국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얼마라도 받고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 이익이라고 나폴레옹은 판단했던 것이다.
먼로는 현기증을 느낀다. 펜션을 사러 갔더니 산 전체를 팔겠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매우 저렴하게. 협상 끝에 매입가는 1500만달러로 정해진다. 1평방마일당 18센트로, 주웠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매매 계약은 4월 30일에 체결된다. 프랑스 협상 대표 탈레랑은 자신들이 무슨 미친 짓을 하는지 몰랐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먼로에게 말했다. “아주 좋은 물건을 싸게 사셨습니다. 잘 쓰십시오.” 매입 소식은 6월 14일이 돼서야 제퍼슨에게 전해졌다. 미국 영토가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난 사실에 제퍼슨은 당황한다. 의회 승인도 없이 사절단 대표가 영토 변경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은 헌법과도 충돌했다. 그러나 합헌이니 위헌이니 따지는 동안 나폴레옹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몰랐고 고민 끝에 제퍼슨은 의회 비준 절차를 건너뛰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제퍼슨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루이지애나 매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아메리카 유일의 강대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아메리카는 아프리카처럼 유럽 열강의 싸움터가 됐을 것이다. 그 시기 청나라는 할양이니 조차니 하는 말로 영토를 뜯기고 있었다. 제일 웃기는 게 암할(暗割)이다. 비밀리에 분할 양도한다는 뜻으로 사실상 양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기강이 파탄 난 청나라 말기의 황당한 외교 기법이다. 이 덕분에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이 파견한 총독과 청나라 정부가 파견한 장관이 협의해서 공무를 처리했다. 새로운 지식으로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청나라는 1872년 30명의 유학생을 미국에 보낸다. 기원전 221년 통일 진나라 이후 중국이 외국에서 뭘 배워오라고 유학생을 보낸 것은 209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획은 이랬다. 4년간 10세에서 15세 사이의 영재를 30명씩 보내 15년 뒤 능력이 가장 출중한 시기에 귀국시켜 국가에 봉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이들에게 유학 기간 중 중국 학문을 병행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중국 영재들은 군주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고 오랑캐의 학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유광훈’이라는 책자를 1주일에 한 번씩 읽어야 했다. 책의 7조는 ‘이단을 몰아내고 정학을 숭상한다’이다.
신학문을 배우라고 해 놓고 이단을 몰아내라는 이 난해한 논리를 굳이 해석하자면 배우되 배우지 말고 배웠으되 익히지 말라는 뜻 정도가 되겠다. 청나라 보수파들의 집요한 시비 끝에 유학생 파견 사업은 1881년 중단된다. 10년 공부는 했으니 중국의 개혁을 위해 뭔가를 했을 법도 한데 돌아온 유학생들은 찬밥 신세였고 이 중 많은 수가 청일전쟁을 전후로 일개 사병으로 참전해 허망하게 전사한다. 중국은 그렇게 기회를 날렸고 같은 시기 유럽과 미국에 초장기 사절단을 보내 신문물을 익힌 일본에 동아시아 바다를 넘겨준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