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을 잊지마라…난, 빌런을 그리는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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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배우& 연기하는 화가 박기웅 '48빌런스' 전시
악당을 뜻하는 단어 ‘빌런(villain)’. 영웅 서사가 담긴 영화나 만화 속에서 어김없이 주연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들이다. 빌런 없이는 히어로도 없고, 극의 긴장감도 없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농부’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로마의 농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을 부르던 말이었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이들이 모두 빌런일 수 있다고, 이 평범한 이들 없이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역설하려던 것일까.
영화 속의 빌런들은 꽤 오랫동안 슬픈 존재였다. 뜨거운 에너지로 작품의 온도를 끓어오르게 하지만, 늘 영웅(또는 선한 자)에게 밀리거나 잊혀지는 존재. 빌런의 내면을 다층적으로 다룬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조커’(2019), ‘크루엘라’(2021)와 같은 영화가 등장한 건 불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48명. 세기의 영화와 드라마 속 빌런의 표정을 포착해 흑백의 강렬한 인물화로 그려낸 이가 있다. 그림을 그리는 배우이자 연기하는 화가 박기웅(38)이다. 올해로 20년차인 그는 최고의 악역 전문 배우다. 드라마 ‘추노’, 영화 ‘최종병기 활’과 ‘각시탈’ 등 여러 작품에서 악역을 도맡아 매번 화제작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그린 악당의 얼굴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 빼곡히 걸려 있다. 연예인이 미술계에 뛰어들어 ‘아트테이너’가 되는 사례는 요즘 흔해졌지만 박기웅은 좀 다르다. 여섯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미대(시각디자인과)를 나온 전공자. 영화판에선 ‘미대 나온 변종’으로, 미술판에선 ‘배우인데 그림에 빠진 변종’으로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지난 22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번이 세 번째 전시다. 왜 빌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나.
악역을 하다 보니 악역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빌런은 두 종류다. 그만의 인생이 있거나, 또는 없거나. 삶의 내러티브가 있는 빌런은 입체적이다. 이 캐릭터들을 연기한 배우들에 대한 존경, 그런 연기를 하는 순간의 감정을 그려내고 싶었다. 타이타닉과 매트릭스를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거기 나온 악역은 사람들이 이름조차 잘 기억 못한다. 타이타닉의 빌리 제인이나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절대적인 역할인데 잊혀진 악역들을 재해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마다 영화와 인물명을 써놓지 않았다. 다 보고 난 뒤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전시장 마지막에서 영화와 역할명, 배우명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작품을 흑백으로 그린 이유는.
다 빼고 싶었다. 인물의 감정만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색채가 있으면 표현이 더 편하지만 흑과 백으로만 채색하는 건 화가의 그림 실력을 낱낱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저 빌런의 눈빛과 표정,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길 바랐다. 친구들은 “앰프도 없이 길거리 버스킹을 하는 것”이라고 걱정도 하더라.(웃음) 그래도 온전히 다가가고 싶었다.
▷멀리서는 비슷하게 보이는 그림들인데 가까이서 보면 다 다르다. 구체적인 창작 과정이 궁금하다. 자신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림을 그린 시간은 1년 반 정도 걸렸다. 사실 대학을 준비할 때 실기도 이론도 모두 1등을 한 기억이 있는데, 다른 작가들보다 내가 손이 빠른 건 다들 인정하는 부분이다. 연기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우연히 하게 됐다. 아마 원하는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 같은 게 더 연기에 몰입하게 한 것 같다.
흑백의 인물화는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스스로 뭔가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못하는 성격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흰 물감은 다섯 가지, 검은 물감은 네 가지 정도를 썼다. 붓도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사용했다. 부드러운 모로 작업하거나 거친 캔버스를 고르기도 했다. 샤이닝의 잭 니컬슨은 족제비털 기반의 털로, 매드맥스의 휴 키스번은 거친 모로 그렸다. 때로 정말 두꺼운 붓만으로 슥 그려내는 방법도 썼다. ▷배우가 포착한 배우의 찰나들이 흥미롭다.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생각날 정도로 강렬하다. 어떤 순간을 포착한 건가.
촬영장에선 “레디~”와 “액션!” 사이에 1~2초의 순간이 존재한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집중력이 온전히 응축되는 팽팽한 긴장의 순간이다. 마치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그 찰나를 사용하는 방식은 배우마다 다르다. 누구는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오히려 이완한다. 그 집중력이 담긴 감정은 순도 100%다. 배우가 보는 배우의 얼굴엔 그 순간의 감정이 짜릿하게 전해지는 때가 있다. 움찔거리는 어떤 근육의 움직임 같은 것도 나도 배우이기 때문에 더 잘 잡아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빌런을 연기할 때, 빌런을 그릴 때 다를 것 같다. 배우 박기웅과 작가 박기웅은 어떻게 다른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틈틈이 그릴 뿐 20년간 연기에만 몰입했다. 연기는 공동 예술이고, 그림을 주로 혼자 그린다. 두 활동의 시너지가 크다. 그런데 배우로서의 스트레스는 캔버스 앞에서 창작으로 풀고,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연기로 해소한다.
▷왜 48명인가.
전시 기획 자체는 독일 미술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8포트레이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상을 개척한 위인의 모습을 70×50㎝ 크기로 담은 작품인데, 작은 크기의 초상화만으로 벽 하나를 채운 전시가 획기적인 발상이었다고 들었다. (원래는 내 마음속에 영웅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가진 빌런들,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 속 빌런의 초상화를 200점 안팎으로 파르테논 신전처럼 쌓아 올리고 싶었다.) 그러다 리히터를 떠올렸다. 48은 참 재미있는 숫자다. 3단으로 쌓아 올려도, 4단으로 전시해도 정확히 사각형이 만들어지니까. 이번엔 그를 차용해 48명으로 좁혔다.
▷당신에게 그림이란, 연기란 무엇인가.
나에게 배우란 서비스업 종사자다. 보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배우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고, 나도 모르게 공감할 수 있는 만드는 게 연기다. 혼자 감정에 취하면 결코 보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감정을 전염시켜야 하는 게, 그래서 온전히 그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배우의 일이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모든 예술은 결국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나의 창작 의도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쉬운 미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두 분야 모두 예술로서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마 스쳐가거나 잊혀진 존재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볼 때도 힘줘서 만든 하이라이트 장면 말고 스쳐가는 컷이 훨씬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을 빛나게 하고 싶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영화 속의 빌런들은 꽤 오랫동안 슬픈 존재였다. 뜨거운 에너지로 작품의 온도를 끓어오르게 하지만, 늘 영웅(또는 선한 자)에게 밀리거나 잊혀지는 존재. 빌런의 내면을 다층적으로 다룬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조커’(2019), ‘크루엘라’(2021)와 같은 영화가 등장한 건 불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48명. 세기의 영화와 드라마 속 빌런의 표정을 포착해 흑백의 강렬한 인물화로 그려낸 이가 있다. 그림을 그리는 배우이자 연기하는 화가 박기웅(38)이다. 올해로 20년차인 그는 최고의 악역 전문 배우다. 드라마 ‘추노’, 영화 ‘최종병기 활’과 ‘각시탈’ 등 여러 작품에서 악역을 도맡아 매번 화제작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그린 악당의 얼굴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 빼곡히 걸려 있다. 연예인이 미술계에 뛰어들어 ‘아트테이너’가 되는 사례는 요즘 흔해졌지만 박기웅은 좀 다르다. 여섯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미대(시각디자인과)를 나온 전공자. 영화판에선 ‘미대 나온 변종’으로, 미술판에선 ‘배우인데 그림에 빠진 변종’으로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지난 22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번이 세 번째 전시다. 왜 빌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나.
악역을 하다 보니 악역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빌런은 두 종류다. 그만의 인생이 있거나, 또는 없거나. 삶의 내러티브가 있는 빌런은 입체적이다. 이 캐릭터들을 연기한 배우들에 대한 존경, 그런 연기를 하는 순간의 감정을 그려내고 싶었다. 타이타닉과 매트릭스를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거기 나온 악역은 사람들이 이름조차 잘 기억 못한다. 타이타닉의 빌리 제인이나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처럼…. 절대적인 역할인데 잊혀진 악역들을 재해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마다 영화와 인물명을 써놓지 않았다. 다 보고 난 뒤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전시장 마지막에서 영화와 역할명, 배우명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작품을 흑백으로 그린 이유는.
다 빼고 싶었다. 인물의 감정만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색채가 있으면 표현이 더 편하지만 흑과 백으로만 채색하는 건 화가의 그림 실력을 낱낱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저 빌런의 눈빛과 표정,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길 바랐다. 친구들은 “앰프도 없이 길거리 버스킹을 하는 것”이라고 걱정도 하더라.(웃음) 그래도 온전히 다가가고 싶었다.
▷멀리서는 비슷하게 보이는 그림들인데 가까이서 보면 다 다르다. 구체적인 창작 과정이 궁금하다. 자신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림을 그린 시간은 1년 반 정도 걸렸다. 사실 대학을 준비할 때 실기도 이론도 모두 1등을 한 기억이 있는데, 다른 작가들보다 내가 손이 빠른 건 다들 인정하는 부분이다. 연기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우연히 하게 됐다. 아마 원하는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 같은 게 더 연기에 몰입하게 한 것 같다.
흑백의 인물화는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스스로 뭔가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못하는 성격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흰 물감은 다섯 가지, 검은 물감은 네 가지 정도를 썼다. 붓도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사용했다. 부드러운 모로 작업하거나 거친 캔버스를 고르기도 했다. 샤이닝의 잭 니컬슨은 족제비털 기반의 털로, 매드맥스의 휴 키스번은 거친 모로 그렸다. 때로 정말 두꺼운 붓만으로 슥 그려내는 방법도 썼다. ▷배우가 포착한 배우의 찰나들이 흥미롭다.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생각날 정도로 강렬하다. 어떤 순간을 포착한 건가.
촬영장에선 “레디~”와 “액션!” 사이에 1~2초의 순간이 존재한다. 배우와 스태프들의 집중력이 온전히 응축되는 팽팽한 긴장의 순간이다. 마치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그 찰나를 사용하는 방식은 배우마다 다르다. 누구는 감정을 한껏 끌어올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오히려 이완한다. 그 집중력이 담긴 감정은 순도 100%다. 배우가 보는 배우의 얼굴엔 그 순간의 감정이 짜릿하게 전해지는 때가 있다. 움찔거리는 어떤 근육의 움직임 같은 것도 나도 배우이기 때문에 더 잘 잡아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빌런을 연기할 때, 빌런을 그릴 때 다를 것 같다. 배우 박기웅과 작가 박기웅은 어떻게 다른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틈틈이 그릴 뿐 20년간 연기에만 몰입했다. 연기는 공동 예술이고, 그림을 주로 혼자 그린다. 두 활동의 시너지가 크다. 그런데 배우로서의 스트레스는 캔버스 앞에서 창작으로 풀고,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연기로 해소한다.
▷왜 48명인가.
전시 기획 자체는 독일 미술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8포트레이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세상을 개척한 위인의 모습을 70×50㎝ 크기로 담은 작품인데, 작은 크기의 초상화만으로 벽 하나를 채운 전시가 획기적인 발상이었다고 들었다. (원래는 내 마음속에 영웅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가진 빌런들, 어린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 속 빌런의 초상화를 200점 안팎으로 파르테논 신전처럼 쌓아 올리고 싶었다.) 그러다 리히터를 떠올렸다. 48은 참 재미있는 숫자다. 3단으로 쌓아 올려도, 4단으로 전시해도 정확히 사각형이 만들어지니까. 이번엔 그를 차용해 48명으로 좁혔다.
▷당신에게 그림이란, 연기란 무엇인가.
나에게 배우란 서비스업 종사자다. 보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배우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고, 나도 모르게 공감할 수 있는 만드는 게 연기다. 혼자 감정에 취하면 결코 보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감정을 전염시켜야 하는 게, 그래서 온전히 그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배우의 일이다. 그림도 다르지 않다. 모든 예술은 결국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나의 창작 의도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쉬운 미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두 분야 모두 예술로서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아마 스쳐가거나 잊혀진 존재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볼 때도 힘줘서 만든 하이라이트 장면 말고 스쳐가는 컷이 훨씬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을 빛나게 하고 싶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