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썩어 문드러지면,//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구더기가 우글거린다.//하늘에서//천사가//뚝,//떨어진 것처럼.” 시 ‘축복’ 전문이다.

삼십 년 전, 등단시인들 몇이 동인을 결성했다. 그 모임을 이끌던 내게, 알코올중독으로 폐인처럼 지내는 한 선배시인이 우연히 마주친 술집에서 이런 말을 던졌다. “부끄럽지 않은가? 몰려다니지 마라.” 지나친 비난이었다. 예술가의 동인활동은 의의가 있는 전통이다. 죄가 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참고 넘어갔다. 연배가 한참 위였고, 그의 ‘시’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고(故) 김영삼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도 두 가지 업적을 부정하진 못한다. 하나는 1993년 8월 13일부터 실시된 ‘금융실명제’다. 1997년 12월 31일 법률 공포됐기에 약 4년5개월간은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유지됐다. 일본은 1990년부터 재무성 행정지도로 금융실명거래를 유도할 뿐 의무도 규제도 없다가 2003년에야 입법됐다. 다른 하나는 ‘‘하나회’ 숙청, 숙군(肅軍)’이다. 취임 첫 부처 업무보고로 국방부를 지목한 YS는 이틀 뒤 육사 제49기 졸업 임관식에서 연설한다. “군인의 길은 개인의 영화보다는 국가를 위한 헌신의 길입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은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흘 뒤 3월 8일 오전 7시30분.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부르고, 4시간5분 만인 오전 11시30분을 조금 넘긴 시각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한다. 4월 2일, 수방사와 특전사 사령관을 교체한다. 전 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등 예비역 장성 3명과 현역 장성 대령 12명이 장성 진급 뇌물거래로 구속된다. 1973년 시작한 방위력 개선사업인 ‘율곡사업’은 1993년 감사원 감사 전까지 20년간 베일에 가려진 채 부패했었다. 국방예산이 정부예산의 3분의 1이던 시절, 율곡사업비가 국방예산의 3분의 1이었다. 무기중개상 등에게서 엄청난 뇌물을 받아 전 국방장관 2명 포함, 전 참모총장 3명과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사법처리됐다. 문민정부 초기 100일 동안 대장 7명 포함, 19명의 장성이 전역됐다. 떨어진 별만 마흔 개가 넘었는데, 대통령이 손수 계급장을 달아주는 중장 이상 인사가 너무 많아 국방부 국장급들의 제복에서 별을 빌려와 달아줬다는 일화는 얼마나 전격적‘이어야만 했는지’를 증언한다. 군부정권의 반복적 회귀를 막는 게 민정(民政) 쟁취보다 더 어렵다. 이렇게 국군 내 사조직 ‘하나회’는 ‘하나회적’ 비리들과 함께 정리됐다. 물론 영어와 브리핑과 아부만 잘하는 똥별 천지 요즘 국군은 논외다.

YS의 두 업적 중 순위가 있을까? 우선이 하나회 숙청, 다음이 금융실명제일 것이다. 한데, 대히트한 드라마 속 재벌회장은 이런 말을 한다. “민주화가 뭔지 아나? 전에는 내 돈 노리는 놈이 군인 하나였다면, 이제는 민간인 세 놈으로 늘었다. 그게 민주화다.”

시대가 복잡해진 만큼 악은 다양하게 둔갑(遁甲)한다. 가령, 과거 군부의 부도덕이 지금 사법부에서 교활하게 변종돼 있다. 군대처럼 사조직이 있어선 안 되는 곳은 단연 ‘법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숙청은커녕 저 연설문에서 ‘군인’을 ‘판사’로 바꿀 수조차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독립성’을 민주공화국이 법원에 보장하는 것은 사조직 따윈 만들지 않겠다는 서약이 판사라는 직업 자체에 투명한 글씨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판사는 ‘고독이 도덕이다’. 인간과 법 사이에 ‘홀로’ 서 있지 않은 판사는 ‘실존적 범죄자’다.

‘축복’은 문득 그 선배시인을 추모하면서 내가 쓴 것이다. 저 징그러운 구더기들은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신호다. 고통은 축복이다. 시체에게는 고통이 없으니까. 환란은 희망이다. 우리를 깨어 있게 하며 가짜를 가려내기 때문이다. 삼십 년 전 그 밤, 진짜 시인인 그의 눈에는 내가 구더기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내 속마음을, 시에 대한 사랑을 위조하여 문단권력을 탐한 나의 죄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폐인 같은 나조차 그 죄가 아직도 이렇게 가슴 아프다. 하물며 법복(法服)을 입은 그대들에게는 어떠한가. “부끄럽지 않은가? 몰려다니지 마라.”